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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 슬 Dec 10. 2018

아내의 일기장 2

맞춤 서비스를 해주던 남자.

 남편과 나는 피크닉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도시락을 싸 들고 여기저기 다녔다.

보통 도시락은 여자가 챙긴다고 듣고 봐왔는데, 이 남자는 항상 나 대신 도시락을 싸왔다.

비주얼도 좋고 맛도 좋았다.

그리고 후식은 내가 좋아하는 간식들이었다.


 내가 아플 땐 약을 사다 주거나, 죽을 만들어 주었다.

그럴 상황이 되지 않을 때에는 찾아와서 죽을 사다 주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많이 아플 땐 옆에서 울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항상 내가 먹고 싶은 걸 물어보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물어보고, 내 기분을 물어보거나 맞춰주고 그랬던 사람이었다.

물론 연애 초반에는 누구나 그랬겠지만, 결혼 후에도 그런 모습은 어느 정도 있었다.

그리고 일단 우리는 장거래 연애였는데, 보통 매일같이 나를 보러 와주기도 했다.

그 사람은 직장인이었고 나는 대학생이라 데이트를 할 때면 8시쯤 만나 11시가 되기 전 헤어졌었는데, 그럼 막차가 끊겨 매일같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야 했었다.

그런데도 차비 같은 게 아깝지 않다며 항상 기꺼이 찾아와줬다.


 결혼을 하기 전, 우리가 결혼을 약속했던 시점엔 남편이 차를 샀었다.

데이트를 하게 되면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는 것이 그 사람의 일상이었다.

장거리 연애를 하던 우리의 거리는 차로도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 걸렸었는데 항상 별말 없이 데려다주길 반복했었다.

그런 모습에 나도 마음을 더 열고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헌신적이었던 그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한 것은 내 탓도 있겠다 싶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고 연인이 헤어지는 것은 어느 한 쪽만의 문제인 게 아니니까.


 우리는 행복했었다. 다만, 서로의 좋은 모습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어두운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큰 결정을 내렸었던 것 같다.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을 간과했던 것을 이제는 인정하게 되었다.

남편과 법정에서 만나던 날을 떠올려보면 우리 사이에는 연인 때 느껴보지 못했던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공기가 너무 답답해서 숨을 쉬기 어렵다고 생각했었고, 그 사람과 헤어졌던 그날, 그 2시간이 너무 답답하고 힘들었다.

마치 내가 숨을 쉬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최근에 이 사람과 정리되지 않은 일이 하나 발견되어 부득이 통화를 하게 되었다.

차가운 내 목소리와는 달리 그저 다정하게 전화를 받는 모습에 화도 나고 어이가 없었다.

지인과의 대화에서 그 이야기를 하자, "남자는 원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서 그럴 수 있어."라는 대답을 들었다.

좋은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의 시작은 좋았지만 끝은 너무 쓰게 느껴졌다.

마치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었다가 결국 상황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아쉬운 마음에 울면서 그 옷을 벗어낸 것과 같았다.


 그 사람과의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지만 도무지 잘 써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잠시 동안 쉬면서 글을 다시 쓰기로 마음먹었지만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 사람과의 기억이 담긴 방 안을 들여다보려 해도 까만 암막 커튼이 가리고 있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마는 그런 기분이랄까...?

아직 나는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잘 정리되지 않았나 싶지만, 그렇다고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절대로.

아마도 남편과의 이야기는 시댁 이야기와는 또 다른 무거움이 담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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