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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 슬 Jan 14. 2019

아내의 일기장 5

시간이 흐른 뒤

 연인일 때의 우리는 그저 손만 잡고 걸어도 좋았다.

나는 학생이라 넉넉하지 않았고 그는 직장인이라 나보다는 풍족했지만 나는 합리적인 연애를 하고 싶었다.

100% 완벽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한 사람만 부담을 갖는 건 싫었다.

그래서 데이트 통장을 만들어 사용했고, 그에 맞춰 데이트 소비를 했었다.

데이트 통장에 내가 넣을 수 있는 돈은 넉넉하지 않아도 함께하기에는 충분했다.

 

 결혼 전 명절이나 기념일 때에 각자의 가족에게 선물을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에도 데이트 통장을 이용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직장인이 되었고 소비의 폭이 넓어지면서 데이트 통장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더 많은 곳을 갈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결혼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엔 넉넉하지 않았지만 함께 부담할 수 있는 선에서 결혼하기로 했다.

부모님께 최대한 손 벌리지 않고 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대출을 받아서 해결했다.

결국 친정 아빠께서 월세집 보증금을 도와주시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함께하는 부부가 되었다.

 

 내가 일찍 결혼하는 걸 아쉬워했던 친정 엄마께서는 혼인신고를 늦추길 바라셨다.

그때 나는 대답했다. 내가 결혼한 기록을 일찍 남기던, 늦게 남기던 주변 사람들은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다 알 거라고.

그래서 나는 어차피 결혼한 거 혼인신고를 늦추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식을 올린 주말을 지내고 우리는 혼인신고를 했다.

 

 혼인신고를 하고 나서 등본에는 나와 그, 우리 둘만 있게 되었다.

이제는 출가외인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고 신기했다.

이혼 후에 등본을 다시 떼었을 때에는 그 넓은 종이에 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왠지 마음은 편했다.

더 이상 책임지고 지어갈 짐이 없는 것 같아서 그랬나 보다.

 

 얼마 전 습관처럼 SNS를 켰는데 지난날의 추억을 보여주는 사진이 보였다.

내 결혼을 축하했던 많은 사람들이 내 결혼식 사진을 찍고, 나를 태그 해서 올려진 게시물이었다.

달력을 보니 이혼하지 않았다면 새로 맞이했을 결혼기념일이었다.

친구에게 카톡으로 '나 이혼 안 했으면 오늘 결혼기념일이었더라. 근데 정말 모르고 있었어.'라고 말했다.

난 벌써 이만큼이나 괜찮아졌다.

 

 누군가는 이혼이 힘들어서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힘들어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보기도 했다.

근데 나는 감사하게도 참 빨리 괜찮아졌다.

왜냐하면 나는 이혼한 후에 당연히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이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나의 현실을 직시하려는 모습으로 그 어두운 터널을 극복할 수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며 하게 된 생각은 '나는 결혼 전에 원래 혼자였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결혼하고 나서 하지 못했던, 결혼하기 전에 하지 못해서 후회했던 일들을 이제는 할 수 있다. 새로운 삶을 살자.'였다.

 

 지금의 나는 정말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직장을 그만둔 뒤 뭐 해 먹고 살까 고민했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기는 싫었다.

그래서 알바 같은 것들을 알아봤다.

지금은 그래서 n잡러가 되었다.

그중 하나는 수익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쓴다.

참 다행인 부분은 1순위로 두고 시작한 일이 잘 풀려 곧 일 하나를 그만두어도 된다.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던 그 말이 떠오른다.

희극이면 어떻고 비극이면 어떠한가?

그냥 내가 보고 싶은 위치에서 보고 느끼고 개선하고 즐기고 그러면 어느샌가 종착점에 가지 않을까?

인생의 목적지는 죽음이라고 했다.

코코 샤넬은 죽기 전 지인에게 '안녕 귀염둥이, 이제 죽음이야'라고 했단다.

나는 그 말에서 여유가 느껴져 그녀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타인이 보기에 내가 사는 삶이 아슬아슬하고 불투명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게 살 것이다.

이제는 내 인생이 타인과 함께하면 그것대로 즐거울 수 있고, 혼자 해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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