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인식 속에 필라테스는 동일한 명사로 인식되어 있다. 방송,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여러 매체에서 필라테스는 한곳을 향해 동일한 이야기를 내뱉고 있다. 오리지널 필라테스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동일한 방향으로 이야기하는 필라테스가 진정한 필라테스의 순기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동일함 속에 나오는 폭력은 무자비하다.
며칠 전 필라테스 레슨을 받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부산 스튜디오에 있을 때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이 거의 없는데 서울에 가면 지하철을 이용한다. 레슨을 받고 김포 공항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러 가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김포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꽤 많이 내려간다. 조금 늦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급하게 자리를 피하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소름이 돋고 말았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동일했다. 모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을 걸어가는데 한 여성은 휴대폰을 바라보면서 나에게 부딪치듯 다가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동일함의 공포를 느꼈다.
소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는 머리글에서 미래 세계를 이렇게 표현한다.
"정치적, 경제적 자유가 감소하면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성생활의 자유는 증가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리고 독자 재는 그런 자유쯤은 촉진시켜도 좋으리라. 마약과 영화와 라디오에 도취되어 공상을 즐기는 자유와 더불어 그것은 운명적인 노예생활에 백성들을 묶어놓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휴대폰을 바라보는 행위가 절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작은 상자 속에는 수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하는 상자 속 세상이 있다.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이 주는 장점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점이 절대적이라고 해서 그것의 노예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독을 잘 이용하면 약이 되지만, 헤어 나오지 못하면 독 그 자체가 될 뿐이다. 모두가 동일한 생각과 행위를 일삼는다면 우리는 전체주의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
주변에 있는 사소한 부분은 시간이 흐르면 큰 문제로 이어진다. 사소한 문제를 쉽게 넘기고 익숙해지면 어느샌가 손쓸 수 없는 문제가 되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 가장 가까이 있는 작은 상자의 노예보다는 주인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주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이다. 세상은 살아가기 참으로 힘들고 머리 아프기만 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단순하게 작은 상자 속 세상만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머리가 복잡해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들여다보지만 조금씩 머리는 더 멍해진다. 점점 사유하는 능력은 퇴화되어 가고 동일한 생각에 흡수된다.
동일함 속의 무서움은 클래식 필라테스에게도 해당된다. 인간은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이 있다. 그것을 잃어버리거나, 발현하지 못하면 동일한 교육 속에 자신의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이 필요 없는 교육법에 속해 있으면 어려움은 생각보다 적다. 타인이 정해놓은 기준대로 생각하고 움직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자신은 타인과 동일한 생각으로 움직임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더욱 올바른 방향이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만든다. 마치 1차 전쟁 이후 전쟁 배당금으로 힘들어진 독일 국민들이, 혜성처럼 나타난 히틀러의 연설을 통해 동일한 신념의 확고함을 가지게 된 것처럼 말이다.
영화 '죽인 시인의 사회' 속 명문 학교의 모습은 동일함을 갖추고 있다. 학생들 개인의 생각은 필요 없다. 명문 대학의 진학이라는 성공법을 따라야 한다. 학생들에게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생각, 동일한 복종'
성공이 보장된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한 인간의 생각은 하찮을 뿐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 조연 닐 페리는 자신이 겨우 좋아하는 것을 찾았을 때 설렘을 잊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을 찾았지만 닐은 아버지에게 빼앗기게 된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찾아왔을 때, 세상을 떠나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감하게 자살을 선택한다.
클래식 필라테스 강사는 사유의 필요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직업이다. 타인의 경험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함을 가진 필라테스 강사가 정형화된 교육 방식만 가진다면, 회원의 자유로움은 속박되게 된다. 닐 페리의 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했던 신념을 아들에게 강요했듯이, 강사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움직임을 회원에게 강요하게 된다. 회원의 바디에 움직임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 속에 회원의 바디를 집어넣게 된다.
인간에게 사유라는 것은 고뇌의 작용이다. 힘들고 괴로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함을 경험하면 자신의 생각이 발현된다. 발현된 경험은 타인의 강요에서 저항하고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생각하고 고뇌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나서야 한다.
그것은
바라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있다.
그러한 것들을 놓지 않고 꾸준하게 가까이한다면 동일함에 붙잡히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나의 고백이다. 그날의 공포감 속에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동일함의 독재 속에 붙잡히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