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강압적인 것에 대한 순응, 강압적인 것에 대한 저항. 무엇이든 마음이 동하게 되면 순응하게 되었고, 무엇이든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저항하게 되었다. 20살 대학교에서 물리학 교수와 대립한 적이 있다. 강의실은 학생들이 시끄러운 상황이었는데 교수는 출석부에 이름을 호명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중간 지점보다 조금 뒤에 앉았는데 뒤에 있던 학생들 때문에 교수의 호명을 들을 수 없었다. 출석이 끝나고 나는 교수에게 말을 했다.
"교수님, 저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제 이름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네 교수님. 하건욱입니다."
"그렇군. 여기 이름이 있군. 그렇지만 자네는 나의 호명에 대답을 하지 않았어."
"교수님.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교수는 나의 말을 자르고 차갑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자네 사정일세. 나는 이름을 호명했고 자네는 대답을 하지 않았어."
나는 얼굴이 벌게지며 교수의 단호함에 저항했다.
"교수님 그건 부당합니다. 저는 제시간에 출석을 했고 시끄러운 상황에서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교수님은 그런 상황을 확인하지 않으셨고, 현재 출석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음에도 결석 처리하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재차 부당함에 대한 말을 이어나갔다. 교수는 조용히 하라고 말했다. 그럼 출석처리가 되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교수는 강의실에서 나가라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후 강의 때마다 지속적인 대립을 했고, 주변 학생들은 나의 행동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영화 '세 얼간이'의 주인공 란초는 명문 대학교의 시스템에 순응하는 학생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기계의 정의를 강의하는 교수에게, 책의 정의와 자신이 쉽게 정의한 것은 차이점이 없다는 도전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당연하게도 교수는 '책의 내용만이 사실'이라고 말하며 쉽게 내린 정의는 가치가 없다는 말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일상에서 흔하게 마주할 수 있다.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불편해한다. 자신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만 가득한 나약한 사람들이다.
'내 말이 다 맞아. 너는 틀렸어'
이런 태도는 오히려 관점을 다르게 바라보는 능력을 퇴화하게 만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자신이 행하는 행위에 대해 확고한 믿음이 깊어질수록 타인의 의견을 배척하기 쉽다. 유연했던 사람이 언젠가부터 고집스러운 사람이 되는 이유다.
칸트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자신의 선택을 반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믿었다. 우리 의도대로 어떤 것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기계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왜 그렇게 했는가?'라고 묻는 것은 거의 항상 의미가 있다. 우리는 그저 본능에 의해 행동하는 게 아니라 이성에 근거해서 행동한다.
칸트는 이것을 우리의 행위 기준이 되는 '준칙'이라고 표현했다.
철학의 역사, 나이절 워버턴
반대로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지속적으로 의심하고 탐구하는 사람들은 관점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그들의 행동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의 진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를 진실되게 믿는다면 넓고 유연한 태도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자신의 관점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웃으며 무시할 수도 있고 관점을 다르게 바라보는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행하던 모든 행동들이 계속 변화되는 습관, 더 나아가 삶의 관점을 달리하는 행위를 지속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란초는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를 진실되게 믿는 사람이다. 그는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은 전혀 없이' 교수들의 지식대로 살아가는 방식을 깨부수려 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란초 같은 사람이 있다.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타인의 언어를 존중한다. 그리고 타인의 언어를 존중하는 화법을 구사한다. 그와 한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면 나의 정신은 한층 성장한다. 타인의 사유를 언어 형태로 듣게 되었을 때, 나의 사유 작용과 함께 새로운 생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함은 다채로운 시각과 관점을 안겨준다.
'정답에 가까움'을 찾아가는 것과 '이것만이 정답이야'라는 아주 다르다. 영화 세 얼간이의 바이러스 교수는 강압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학생들이 나쁜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는 사기꾼이 아니다. 자신의 방식이 학생들에게 좋은 결과(취업)를 주기 때문에, 이때껏 해온 방법이 옳다는 것을 믿고 있는 신념에 가득 찬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옳다'라는 사실에 빠져 있으면 주위를 둘러볼 수 없다.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없고, 미세한 다름을 인지하기 어렵다. 그들에게는 동일함만이 옳고 정해진 패턴을 신뢰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각과 다른 패턴이 나타나면 그들은 불안하고 한없이 나약해진다. 자신의 방법이 부정된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한 거친 행동만을 하게 된다. 흥미로움, 설렘, 즐거움으로 나타나는 변화는 없다. 변화되지 않고 유연하지 않기에 다채로운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마주하면, 그들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전문 분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유연한 태도와 다채로운 관점,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진 란초 같은 사람은 흔하지 않다. 만약 자신이 배우는 분야에서 그러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행운이라 말할 수 있다.
소설 '파친코'의 노아는 어린 시절부터 세상의 압력과 관계의 압박 그리고 보이지 않는 권위, 그것들로부터의 방식에 익숙해서 자신의 감정을 잘 들어내지 않는다. 묵묵하게 참아내고 세상이 정한 길대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할 뿐이다. 어렵게 들어간 와세대 대학에서도 교수의 생각대로 생각하고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다 교수를 향한 도전적인 말을 뱉는 아키코를 보면서 자신은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내면에 발현되지 못한 자신의 실제 감정과 권위에 눌린 감정 속에서 노아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리고 태생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몰린 것을 깨닫게 된다. 멀리 도망치지만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노아는 권총으로 자살한다.
아내와 함께 필라테스 워크샵을 갔다. 워크샵 진행 강사는 한 남자 선생님의 동작을 보면서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할 거야? 틀렸잖아!"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는 사람의 말을, 남자 선생님은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워크샵 진행자의 시각에는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구분이 보였다. '명확한 방향과 큰 틀 속에서 정답을 찾아간다' 그것의 언어로부터 온몸의 경험을 느꼈던 나로서는, 진행 강사의 행동을 공감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강요하는 것으로 보였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에 빠진 진행 강사는 나의 움직임을 보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어깨의 움직임과 내가 움직이는 어깨를 자신 마음대로 비교하고 정의 내렸다. 전체적인 움직임을 보지도 않았고 여러 번 본 적도 없으면서 아주 쉽게 자신의 생각을 정해버리고 입으로 뱉어냈다. 나는 불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 사람의 모습에서 불안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만 느껴졌을 뿐이다.
그 사람의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사실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어떻게 발현하는가'라는 다른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세 얼간이의 바이러스 교수처럼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고 타인의 생각을 배척하는 방식을 고수하면 결과는 있지만 권위를 앞세운 창의적이지 않은 존재만이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