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짤막하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예강 Dec 16. 2020

053. 나탈리, 데미언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며칠 전 내린 눈이 세상에 남아 있던 옅은 훈기마저 모두 앗아가 버리고 나서야 겨울이 얼마나 시린 계절인지를 기억해 낸다. 춥다. 이런 날엔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지.

  나탈리 포트만에 대해 백은선 작가가 쓴 짧은 글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나탈리 포트만이 나왔던 영화들을 하나씩 상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책을 덮자마자 「클로저」를 다시 찾아보았다. 왜냐하면 분명 영화를 봤음에도 몇 개의 장면 외에는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2005년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했고, 난 그때 대학 동기 몇 명과 함께 역사 건물에 있던 영화관을 찾았다. 동기들과 보기에 적당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그때 했었던 것 같고, 당시 인물들의 감정선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영화를 다시 본) 지금 한다. 영화는 재밌었다. 휘발된 기억 때문에 마치 처음 본 것처럼 푹 빠져서 봤다.

  그러게,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나탈리 포트만이 분한 앨리스(와 제인)가 런던과 뉴욕을 걷는 첫 씬과 마지막 씬에 깔리는 데미언 라이스의 목소리에, 아, 맞다, 이 곡이 이 영화의 OST였지 싶더라. 그래서 영화를 보자마자 앨범을 다시 찾아들었다. 음악은 청각과 시각을 모두 자극한다. 음악을 들었던 때의 장면들을 몽땅 가져와 앞에 훌훌 펼쳐놓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난감함과 낭패감. 음악을 들으니 이십 대 초반의 내가, 그래서 서툴고 설익었던 내가, 그래서 모든 걸 망치고 엉망으로 만들었던 내가 떠오른다. 패배자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슬픔에 경도되었던 그때의 나는 지금 생각해보니 가여운 존재였다. 스무 살은 누구나 서툴고 설익으며, 그래서 모든 걸 망치고 엉망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 몰랐다.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친한 스무 살이 있다면 알려주고 싶은데 없네.) 그래서 궁금하다. 삼십 대 중반인 지금도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인 것 역시 당연한 건지.

  

  젊었을 때 나는 슬픔에 매료되었다. 슬픔이 흥미로워 보였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 줄 에너지 같았다. 늙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제 나이가 든 나는 슬픔이 싫다. 나는 슬픔이 자체의 에너지가 없이 내 에너지를 은밀히 사용한다는 걸 안다. 슬픔이 납처럼 무겁고, 숨 막히며, 반복적이고, 해결책이 없다는 걸 안다.

  메리 올리버 「긴 호흡」


 메리 올리버가 이렇게 쓴 건, 나이가 들어서도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느끼기 때문일까. 슬픔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 잘 알지만 차양을 드리우면 결국 그 그림자 속에 가려질 수밖에 없는, 납처럼 무겁고 숨 막히지만 해결책이 없기에 반복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감정이기 때문일까. (메리, 그곳은 슬픔이 없겠지요.)

  스무 살 무렵 느꼈던 슬픔은 마치 호주머니 속 유리조각 같았다. 타인에게 들키기 싫어 주머니에서 꺼내지는 못하고, 그저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손등이며 손바닥, 손가락을 온통 생채기 냈다. 그 유리조각은 이제 시간에 풍화되어 모래 알갱이가 되었다.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빠져나가며 더 이상 심각한 상처를 입히진 않는다. 하지만 연약한 피부는 모래알에도 베일 수 있으니 이제 그만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자. 추억여행은 짧게.

매거진의 이전글 052. 연필에 대한 입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