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짤막하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예강 Dec 29. 2020

055. 황탯국을 끓이기 전에

  부모님은 또래 친구들의 부모님에 비해 열 살쯤 나이가 많았다. 어머니는 스스로 그 점을 몹시 창피해하셨고, 난 판단 없이 그 창피함을 학습했다. 언제나 열 살쯤 더 늙어 있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던 거다. 피부가 얇고 민감한 데다가 속상한 일이 잦아 얼굴에 주름이 유독 많았던 어머니는, 낯선 사람들이 본인과 나를 번갈아보며 딸인지 손녀인지 물을 때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꼭 내게 당부했다. 일찍 결혼해서 아이를 얼른 낳으라고. 하지만 그 딸은 자신을 낳았던 어머니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도 혼자이나 앞으로도 쭉 혼자일 예정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거나 자녀가 나를 부끄러워할 일은 없을 테다.

  이제는 부모님의 나이 많음이 더 이상 창피하지 않다. 대신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리고 미어지는 마음이 든다. 어머니는 가끔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 '10년쯤 더 살 수 있을까', '죽을 때 많이 고통스러울까, 아녔으면 좋겠다', '죽고 나면 그저 사라지는 거겠지', '치매에 걸리지 않게 책도 읽고 글씨도 많이 써야겠다'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그럴 때마다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방법이 요원하다. 태어나는 데에는 순서가 있어도 가는 데에는 그렇지 않다며 내가 먼저일 수도 있다는 최악의 농담이나 할 뿐이다. 그저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사는 동안 몸과 마음 잘 돌보며 안분지족 하자는 결론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는 게 그나마 차선이다. 

  얼마 전 친구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알고 보니 친구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와 연세가 같았다. 장례식장에서 친구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더해 장례를 치른 장녀의 고단함을 토로했는데, 코로나 시대의 조문객 연락과 맞이, 영정사진, 수의, 장례식장, 과일과 꽃의 수준, 상차림 반찬 개수, 관과 유골함과 납골당, 상조 등급 등 장례가 얼마나 현실적인 일인지 훅 다가왔다. 부모님이 부재할 본가 풍경의 쓸쓸함을 떠올리다가 저 수많은 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로 생각이 옮겨 가기도 했다. 부모님을 상실하게 될 때를 자꾸만 먼저 상상하는 일, 그리고 구체적인 대응을 가늠하는 일이 불효인 듯해 마음이 좋지 않으나 필요한 일일 거다. 

  또 필요한 일이 있다면 기억을 위한 기록. 사진, 영상, 목소리, 그리고 몇 줄의 일기를 남기는 것 외에 또 뭐가 있을까. 하지만 그 기록들을 덜 후회 없이 들춰보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나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더 자주 다가가고, 더 많이 받아들이고, 더 크게 표현해야 하는데.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세차게 티 내야 하는데, 참. 무미건조한 나는 그저 황탯국을 끓이기 전에 괜히 전화를 드릴뿐이다. 이미 다 아는 레시피를 여쭈었다. 어머니는 이미 다 아는 레시피를 자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들을 몇 마디 더 공유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내게 오래 남겨지는 건 자동으로 저장된 통화 녹음 파일일까, 시원하고 부드러운 황탯국 끓이기가 얼마나 쉬운지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목소리 속 우쭐함일까, 아니면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귀엽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일까. 자, 이제 황탯국을 끓이러 가자. 이미 아는 레시피라도 어머니의 맛을 결코 낼 수는 없는.

매거진의 이전글 05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