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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강 May 02. 2024

호도

입말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지만 뉴스나 신문기사와 같은 보도자료에서는 흔하게 등장하는 단어, 호도. 오늘 아침 "...마치 현재의 갈등이 금전적 동기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호도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읽는데 갑자기 이 단어가 눈에 딱 걸리는 거다. 가끔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익숙한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호도. 풀칠할 호糊 칠할 도塗. 풀을 바른다는 뜻으로, 명확하게 결말을 내지 않고 일시적으로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버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네이버 사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메타포와 상징으로 가득 찬 단어였다. 


오래전에 안양으로 주말마다 봉사활동을 갔던 때가 있었다. 안양1번가에 위치한 장애아동 보호시설에서 청소 같은 잡일을 하거나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날이 좋으면 근처 공원으로 나들이를 가기도 했지만 보통은 시설 안에 머물렀다. 


동화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정확히는 동화책에 그려진 삽화 속 캐릭터들을 좋아했다. 공주일 때도 있고 동물일 때도 있고 자동차일 때도 있었다. 물론 싫어하는 캐릭터도 있었는데 난 끝까지 그 기준을 파악하지 못했다. 아무튼 아이돌 팬이 포토카드를 모으듯 그 아이는 캐릭터들을 모았다. 그 아이 입장에서는 가위 사용이 서툴기도 했고 위험하다고 금지되었기 때문에 책에서 캐릭터를 오려낼 일손이 늘 필요했는데 몇 번 내가 차출되었다. 복지사 선생님의 눈을 피해 인적이 드문 방 한편에 자리를 잡으면 내 손엔 가위가 쥐어지고 아이는 내 곁에 앉아 동화책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긴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특정 캐릭터를 가리키는 거다. 그럼 나는 별 수 없이 동화책을 파훼했다. (친구들과 같이 봐야지, 책은 찢거나 자르는 거 아니야 등등의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고 뒷수습이 어려운 상황이 바로 뒤따르기 때문에 복지사 선생님들도 어느 정도는 눈감아 주는 분위기였다.) 조금의 삐뚤어짐과 어긋남을 용납하지 않은 고용주 때문에 꽤 집중해야 하는 섬세한 작업이었다. 그렇게 떨어져 나온 캐릭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이가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는 공책이 있다. 뒷면에 물풀을 잔뜩 발라서 그 공책에 차곡차곡 붙이는데 물론 수집광들의 우표책이나 띠부띠부씰 앨범 같이 정돈된 모양새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미 비어 있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붙인 곳 위에 또 붙이고 그 위에 또 붙이고 해서 두께는 상당하고, 과다 사용한 물풀로 지저분하게 끈적인다. 욕심 내서 좋아하는 것들만 잔뜩 골라내어 한데 모아 두었지만, 결국은 제대로 형태가 남은 건 거의 없는 셈이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냐고? 그냥 '호도'라는 단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갑작스레 떠오른 기억이라서. 


호도의 유의어로는 '무마'가 있는데, 어루만질 무撫, 문지를 마摩. 손으로 두루 어루만진다는 뜻이란다. 그게 첫 번째 뜻풀이고, 두 번째는 '타이르고 얼려서 마음을 달램', 세 번째는 '분쟁이나 사건 따위를 어물어물 덮어 버림'이다. (또 네이버 사전. 보통 세 번째로 쓰지 않나. 사전에 실리는 순서와 의미의 사용 빈도는 상관이 없나.)


누구에게나 무언가를 흐지부지, 어물어물 덮어버리고 싶은 때가 있지. 악의와 연관이 없다면 그건 부끄럽거나 슬프기 때문일텐데, 그럼 쓰담쓰담 해주면서 그 마음을 달래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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