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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강 Dec 01. 2020

050. 생로병사

  매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위험한 생각은 아니다. 사춘기 시절 잠 못 드는 밤 누구나 빠져들곤 하는 생각을 여태 줄곧 계속해 왔을 뿐이다. 김영민 선생님께서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했지만, 난 아침이든 밤이든 틈만 나면 죽음을 생각했다. 죽음은 태어나고 늙고 병듦과 유의어라 결국 매일 생로병사에 대해 생각한다. 뚜렷한 질문이나 답도 없이 그냥 그 단어들이 불러내는 이미지들을 공상한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다가 감정의 예민한 결을 건드리면 곧잘 눈물짓지만, 이상하게도 책을 읽고 운 기억은 많지 않다. 빈도 수로 따지면 음악보다는 뜸하지만 영화보다는 잦게 접하는데도. 어린 시절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을 때마다 오열한 기억이 있어 내 인생의 눈물버튼 책으로 남몰래 지정해 놓았는데, 그 절절한 기억이 상할까 봐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 읽은 책 중에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우리는 맞으면 아프니까 운다. 

  굴러 떨어지는 것, 긁히는 것, 찢기는 것, 일하는 것, 추위나 더위 따위가 다 고통스럽다. 

  -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


  그리고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을 더한다. 남궁인의 「제법 안온한 날들」. 조짐을 보이다가 "마침 비보를 받고 달려온 보호자가 담당 의사를 찾았다. 두 아들이었다. 큰 쪽은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보아 고등학생 같았고, 작은아이는 아직 초등학생으로 보였다."라는 문장을 만나자, 입고 있던 파자마 소매가 흥건하게 젖도록 펑펑 울었다. 

  다 울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난 생로병사의 고통 앞에 선, 그러나 당연히 아직은 무언가에 맞서기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에게 곧잘 감정이입을 하나보다 싶었다. 나도 모르게 내 어린 시절을 겹쳐보는 것일까. 얼마 전, 늘 용기 내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고백에 드디어 성공했다. 어린 시절의 어떤 부분을 떠올리는 게 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의 트라우마가 성인이 된 지금의 나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치는지 말이다. 스스로 자각하는 순간부터 매일매일이 힘들었다. 그건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어린 시절 가족이라는 지붕 밑 가난과 폭력과 수치와 자기혐오에 대한 이야기다. 치유하기 위해서, 원망하지 않기 위해서,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여태 아물지 못한 상처를 응달에서 꺼낼 필요가 있었다. 어둡고 습한 데서 곪고 터진 채 방치된 환부가 볕 아래에서 적나라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나더라도. 하지만 결심하기까지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었고 무엇보다 내 고백이 누군가에게 흉기가 될까 봐 두려웠다. 말로 내뱉는 순간 청자의 기억 속에 명문화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고백의 대상이 어머니였기에. 

  누군가를 이해시키는 것은 어렵고, 의문과 오해 앞에서 과거의 구체적인 상황과 사건을 헤집어야 하는 건 힘겨웠다. 눈물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몇 번이고 말을 더듬었고 가장 적당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수없이 멈추면서 그렇게, 기어이 고백에 성공했다. 아니, 성공이란 말에는 어폐가 있다. 어떻게 해도 성공할 수 없는 고백이었다. 고희의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소환된 나쁜 기억의 편린과 그 속에서 아직도 허덕이는 장성한 자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몸만 비대하게 큰 자식은 작고 야윈 노모에게 쏟아낸 그 말들을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그날 그 고백의 끝은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였지만, 각자의 마음 깊은 곳 사정은 알 수 없다. 다만 변함없이 우리는 자주 메시지를 보내고 통화를 하며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고 서로의 건강을 염려한다. 

  매일 죽음을, 생로병사를 생각하는 습성은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그는 사람이 나고 죽음을 줄곧 경이롭게 여겼다. 그리고 수많은 질문을 내게 던졌는데, 사실은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겠지만, 난 그때나 지금이나 대답할 능력이 하등 없다. 그냥 다른 자리에서 엇비슷한 질문을 떠올려보다가 가끔씩 깨닫는 게 있다면 가볍게 공유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서로의) 생로병사가 덜 고통스럽고 덜 비참하기를 바라고, 그 앞에서 더 겸허하고 더 너그럽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과거에 천착하지 않고 미래를 부러 짐작하지 말고 그저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어려워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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