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업무일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예강 Dec 01. 2020

2020년 12월 1일 업무일지

01

  20대부터 약 10년 간 이어져온 회사 생활을 중단하고 프리랜서로 전향한 이후, '일로 만난 사이'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특히 퇴사한 지 5년도 더 된 첫 회사에서 만난 인연들이 마치 박씨 물어다 준 제비처럼 일감을 많이 던져주었고 그건 내 생계에 분명한 도움이 되었기에 늘 감사했다. 

  프리랜서를 하며 첫 안면을 튼 경우 회사를 대변해 일을 주는 담당자가 나보다 나이가 많기도, 내 또래이기도, 나보다 나이가 적기도 했다. 반면 알고 지낸 사람들의 경우 대체로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내가 사회초년생 때 만난 사람들은 스스로 대표가 되어 작게나마 회사를 차리거나 다른 곳에서 새롭게 둥지를 틀었으며, 아닌 경우는 대부분 이 바닥을 떠났다. 물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얼마 전에 몇 년 만에 연락을 해 내게 작업 의뢰를 한 A는 결혼과 출산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을 쉬었다가 막 돌아온 상태였고 그 복귀작을 함께 할 파트너로 나를 떠올렸다. 반가웠고 애틋했다. 동일한 직무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A는 그중 내가 아는 유일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날 떠올려 줘서 감사한 건 디폴트.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일로 만난 사이'에게서 작업 의뢰를 받았다. B는 나의 세 번째 회사에서 만난 사람인데(난 총 네 군데의 회사를 다녔는데, 네 번째 회사는 한 달 만에 퇴사했기에 세 번째 회사가 내 마지막 회사와 진배없다.) 당시에 그는 사회초년생이었다. 내가 채용공고를 내고 내가 이력서를 검토하고 내가 면접을 보고 내가 근로계약서를 작성해 입사한 새내기 직원이었다. (세 번째 회사는 규모가 작았고 난 내가 맡은 직무 외의 다른 것들도 맡아하고 있었다.) 같이 일한 게 일 년쯤 됐을까. 퇴사하고는 연락이 뚝 끊겨서 잊고 지냈는데, 오늘 몇 년 만에 연락이 온 거다. 본인이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함께 하자고. 

  주도적으로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작업 비용을 제시하고 일정을 조율하는 제법 프로페셔널한 B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일을 거절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 프로젝트는 내가 이제껏 진행해 온 이전의 프로젝트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고, 작업 비용은 적었지만 수용 가능했고, 일정도 괜찮았다. 미팅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은 후에 그 묘한 기분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프리랜서가 많은 이 바닥은 다른 경직된 회사에 비해 위계질서가 강하지 않고 직급이나 나이가 상황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다. 경력보다는 실력에 의해 작업자를 찾고 손발이 잘 맞는 파트너십이라면 특별한 조건이나 기준 없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건 분명한 장점인데, 왜 어울리지 않는 꼰대 마인드? 이 묘한 기분은 '어라?'에서 나오는 옹졸함 맞겠지? 

  모집단의 중간 즈음에 있는 나는, 또 일을 주는 입장이 아닌 받는 입장일 수밖에 없는 프리랜서 작업자인 나는 이제 점점 더 나보다 어리고 경력이 적은 사람들을 발주자로 맞는 경우의 수가 늘어날 것이다. 30대인 지금은 20대로부터, 40대가 되면 20대와 30대로부터, 50대가 되면 20대와 30대와 40대로부터. 더 이상 버티지 못하거나 다른 꿈이나 대안을 찾았다거나 하는 이유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야 되는데, 그러려면 자존심은 버리고 자존감은 높이자. 일은 신성하고 일감은 귀하다. 내 실력은 나의 쓰임으로 평가받자. 내가 형편없다면 누구도 날 찾지 않을 테니. 그리고 70년대 생, 80년대 생 보다 90년대 생, 00년대 생에게 인기 많은 게 더 뿌듯하지 않겠는가. 


02

  갑작스럽게 밤에, 주말에, 휴일에 연락을 받는 것. 낮에 전화해서 당일 밤까지, 금요일 전화해서 월요일 아침까지 작업물을 요구받는 것. 너무 비일비재하다. 안 된다, 못 한다, 시간을 더 달라 요청할 때도 많고 그들의 개념 없음과 예의 없음에 맞서 따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해달라는 대로 해 준다. 다음의 일이 볼모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랴.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 

  오늘도 그렇게 예정이 없던 작업을 저녁에 부랴부랴 해 놓고 나니, 얼마 전에 신예희 님의 EO 인터뷰가 떠올랐다. 한 번 더 볼까? 프리랜서 2년 차는 22년 차에게서 배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YWF8fupl88&ab_channel=EO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