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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욱근 Mar 23. 2020

혜숙 씨의 검버섯

창문이 심해처럼 짙은 감색을 띤다. 달은 졌지만 해는 아직 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요란한 알람 소리가 혜숙을 깨웠다. 탁. 딸꾹질 멈추듯 시계를 한 대 치니 방 안은 다시 잠잠해졌다. 혜숙은 이불을 걷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쌀을 씻는 일이었다. 아이 둘, 밥 한 숟갈이라도 떠먹이고 나가려면 제 몸 씻기 전에 미리 밥을 안쳐 놓아야 했다. 물 양을 맞추기 위해 손을 쌀 위에 올려놓자 수면 아래로 거무스름한 것이 일렁거렸다. 잠시 후 물이 잠잠해지고 그녀의 손등 위로 검은 점 세 개가 나타났다. 검버섯이었다.


둘째 아이가 열 살이 되던 해 혜숙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남편은 늘어나는 생활비에 힘이 부친 듯했다. 빚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쓸 수 있는 돈도 없었다. 혜숙은 결혼 전에 다녔던 휴대폰 부품공장에 다시 연락했다. 그녀를 기억하던 최부장이 이것도 인연이라며 환하게 맞아줬다. 다른 사원들에게는 비밀이라며 월급도 십만 원이나 더 얹어줬다. 그런데 인연이 문제였다. 최부장은 가끔 인연의 앞 글자와 뒷글자를 바꾸어 생각했다. 시시콜콜한 일로 혜숙을 방으로 불러내기 일쑤였고 가끔은 이상하리 만치 가까이 붙어 앉으라 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나고 혜숙 씨의 손등엔 검버섯이 피어났다. 말 줄임표인 냥 일렬로 찍힌 까만 점 세 개. 침묵의 표시였다. 


오늘도 대영 산업의 컨베이어 벨트는 빠르게 돌아간다. 노란 조끼를 입은 사원들이 개나리처럼 길게 늘어서있다. 제품을 포장하는 박스 소리가 혹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소리 같기도 하다. 그때 평화를 깨고 실내에 사이렌이 울렸다. 사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최부장의 자리를 응시했다. 최부장이 불량품 상자를 한 손에 쥐고 생산 라인 앞으로 걸어 나왔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맥박처럼 울린다. 그가 멈춰 선 곳은 혜숙 씨 맞은편 응우옌 앞이었다. 응우옌이 기다란 팔을 가지런히 모았다. 집단이 성공하기 위해선 공공의 적이 필요했다. 하나를 꼬집고 나면 나머지는 저절로 괜찮아졌다. 오늘도 응우옌이었다. 최부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 후 방으로 올라오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응우옌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혜숙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응우옌의 몸에도 이미 점이 생겼을 거라고. 다만 우리의 피부색과 달라서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잘 보이지 않을 뿐 분명 여러 개의 점이 있을 거라고. 아니 어쩌면 응우옌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점일 수도 있다고 느껴졌다. 혜숙은 손등 위의 까만 검버섯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혜숙이 셔틀버스에 올랐다. 밤은 하늘과 산의 경계를 무너트려 하나의 까만 덩어리로 만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아래 줄지어 놓인 가로등. 그녀는 공허한 터널을 향해 끊임없이 달렸다. 혜숙 씨의 눈 앞에 까만 점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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