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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Oct 20. 2019

나쁜 기억

실수

결국 그는 우리 고모 앞에까지 왔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술을 먹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용서를 받아주십시오. 이 친구는 똑똑하고 현명합니다. 좀 더 같이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브라질 계약건만 잘 해결된다면 상황은 더 좋아질 겁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미스김한테 말씀 좀 잘해주세요.”

그러면서 급하게 마트에서 사 온 두유 한 박스를 고모 앞으로 슬그머니 내밀었다. 그의 사과가 끝났다. 그는 실수를 했다고 말했지 그 실수가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저지른 그 ‘범죄’를 ‘실수’라는 가벼운 말 한마디로 덮어버렸다. 그리고 고모가 다시 말했다.

“애를 데리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게 정상인가요? 얘보다 더 큰 자식도 있다면서요. 이전에 서울로 직장을 다닐 때도 애가 한 번도 취해서 집에 들어온 적이 없는데, 왜 그쪽이랑 회식만 하면 술이 취해서 집에 들어오느냐고요.”

“그 점은 제가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운동을 시작했다고 하길래 기특해서 밥 한 끼 사준다는 게 그렇게 됐습니다. 제자식도 운동을 시작했을 때 근육통에 시달렸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까 그게 너무 기특해서...”

그의 얼굴에 죄책감이란 없었다. 그저 낯짝이 두꺼운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를 기특하다고 말하는 그 더러운 입이 싫었다. 구역질이 났다. 그리고 속도 없는 그는 자식 자랑을 십 여분 간 늘어놓기 시작했다.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래. 내가 그 밥과 술을 얻어먹지 말았어야 했다. 회식을 명분으로 간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잘못한 건 없는데 왜서 부끄러움과 죄책감의 몫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걸까. 고모의 옷자락을 약하게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고모 그냥 가자 이제.”

황급히 자리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너도 잘못이야. 저런 늙은 놈을 왜 따라가. 저 속을 몰라서 따라가? 딸 같은 너랑 무슨 회식이냐고. 그걸 모르는 게 말이 돼? 빨리 들어오라고 전화했잖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고모는 내게 화를 냈다.

“그 새끼가 내 몸도 만졌어. 섹스하고 싶다고 말했어. 고모한테 그건 말 안 하더라.”

나는 정말 몰랐다. 나는 정말 그 자리들이 단순한 회식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런 회식자리를 세 번째쯤 갖고 난 후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그제야 알아챈 거다. 우발적인 감정이었든 계획적인 감정이었든 사장과 직원이라는 타이틀을 떠나 그는 나를 자신이 마음먹으면 건드릴 수 있는 약한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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