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잘못
사실대로 말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고모는 내게 그냥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넘기라고 말했다. 고모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그 속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 이런 일을 당한 여자들의 심리는 보복당할까 봐 두려울 거다. 이 상황이 더 크게 벌어진다면 우리 집 앞에 칼이라도 들고 찾아올 것 같았던 거다. 경하게 끝낼 수 있는 이 사건이 중하게 벌어지게 될 경우가 조금은 두려웠던 거다. 이해는 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가능했다. 나도 두려웠으니까. 심지어 그 험상궂게 생긴 늙은 놈과 길을 가다가 마주치기라도 한다는 상상조차도 끔찍했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에서 나를 대신해서 용기를 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이었고 나는 이 사실을 부모님께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고모의 판단은 옳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건이 있은 이후로 나는 집 밖으로 나가기 싫어졌다. 남들은 이런 나의 행동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겨우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고 할지 모르겠다.
“네가 잘못했어. 그걸 모르는 게 말이 돼? 그 늙은 놈 속을 모르는 게 말이 되느냐고! 그냥 경험이라 생각하고 넘겨. 나쁜 일 먼저 당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출근하지 마.”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니 모든 게 내 잘못 같았다. 일이 끝난 후 그 회식을 거절했다면, 그놈과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 노래방이라는 공간을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을 테니까. 그렇게 친절하고 바보같이 2차를 가자는 말에 응한 모든 게 내 잘못 같았다.
다시 한번 생각했다. 출근은 고사하고 나는 월급이 걱정됐다. 지난달의 급여를 받지 못할까 봐 걱정됐다. 근로계약서 없이 근무를 했기 때문에 그가 급여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왠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일 것 같았다. 160만 원을 사람 얼굴 한 번 보지 않겠다고 날릴 수 있는 그렇게 쿨한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출근을 고민하고 상황을 갈등했다. 내가 그를 미리 신고라도 한다면 그에게 받지 못할 급여가 걱정됐고, 대자보라도 크게 붙여서 나의 상황을 알리자니 우리 고모에게까지 피해가 갈까 봐 두려웠던 거다. 결국 일차적으로 급여 날짜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후에 상황을 판단하기로 했다. 이럴 수밖에 없는 나 자신에게 자존심이 상했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때는 한창 조문기 성추행 사건으로 매스컴이 시끄러울 때였다. 뉴스에 나오는 저 일들이 나한테 벌어지다니. 게다가 나의 잘못이라니. 이게 어떻게 나의 잘못이 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화가 나고 눈물이 치밀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상처가 없는 게 아니었다. 가슴에 남는 상처는 더 깊게 남을 수 있었다. 나는 괜찮을 줄 알았다. 왜냐하면 사건은 경하다고 판단이 됐으니까. 그는 나에게 아무런 외상을 입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심지어 남들이 툭 던지는 말 한마디. “네가 잘못했어.”,”너도 잘못이 있어.” 과연 나는 정말 잘못했던 거고 정말 잘못이 있었던 걸까? 사건을 좀 더 냉철하게 바라보자는 거다. 아니. 나는 잘못이 없었다.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의 행동은 실수가 아닌 ‘범죄’였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사건이 벌어지고 난 한 달 뒤, 나는 경찰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