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색 입히기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지역을 여행하고 나면 그만큼 나의 세계가 커지는 경험을 한다. 합천군 유전리. 한 달 전에 동거인과 함께 여행으로 다녀온 곳의 지명이다. 저마다 합천 하면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겠지만 아마 합천에 대해 무지한 대부분의 한국인이라면 팔만대장경과 해인사가 아닐까 싶다. 너무 오래전 일이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을 소환해 보자.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처음 배웠던 팔만대장경과 그것을 보관하고 있는 절 해인사. 그 속에 얽힌 역사적 함의는 차치하더라도 '합천=해인사'가 '부산=해운대'처럼 공식으로 남아 있다. 딱 여기까지가 합천에 대한 사전지식 전부였다.
우리는 여행지를 물색할 때 숙소부터 찾는다. 내가 숙소의 청결 상태에 대해 민감한 편이라 그 부분이 충족되지 않으면 여행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원하는 숙소를 예약하지 않으면 그곳이 어디든 잘 못 지낼 확률이 높다. 그래서 숙소부터 확보하고 그 근처를 발굴하는 형태로 여행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사실은 나에게) 잘 맞는다. 이번에 우리가 합천을 여행지로 택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이다. 합천호를 전망으로 한 작은 펜션인데 최대 투숙팀이 4팀이고, 큰 실내 온수풀과 히노키사우나, 다이닝룸이 객실마다 하나씩 갖춰져 있어 아직 쌀쌀한 3월 초의 날씨에 휴식을 위한 여행으로 적당했다. 펜션을 기준으로 반경을 조금씩 늘리면서 가볼 만한 곳들을 검색해 봤지만 해인사 이외에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어서 오히려 홀가분하게 푹 쉬자는 마음으로 이 숙소를 예약했다.
숙소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대부분 먹고 씻고 잤다. 숙소 주인은 주변에 갈만한 곳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기어코 호숫길을 찾아서 혼자서 한번, 동거인과 한번 산책을 했다. 그곳에서 2박 3일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심심하고 순한 맛 여행은 처음이라 여행을 다녀오고서도 기분이 묘했다. 여행하는 동안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가 사진마다 GPS 정보가 저장되어 있어 구글맵 기반으로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와 걸었던 길을 되짚었다. 합천은 행정구역상 군으로 경상남도 서북부 산간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숙소 앞에 늘 고요하던 합천호는 생각했던 것보다 컸고, 낙동강 지류인 황강을 막아 합천댐을 만들면서 생겨난 인공호수였다. 체크인 전에 잠시 들렀던 해인사는 가야산 중턱에 있었고, 해인사에서 숙소로 가는 동안 거창군을 경유했다. 합천의 작은 마을 유전리라는 곳에 우리가 묵었던 숙소가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머무는 당시에는 특별히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마을 이름이었지만 여행 이후 검색을 통해 버드나무가 많아 버드나무로 만든 살이라는 뜻의 유전(柳箭)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도 위에 표시되지 않았지만 호수길을 걸을 때 부스럭 소리에 놀란 채 만난 고라니 두 마리, 경운기 타고 이동하며 천천히 쑥을 캐시던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 방향에 따라 해를 등지기도 하고 마주 보기도 하며 걸었던 구불구불한 길, 3월 중순 남쪽 마을의 매화꽃, 나무 아래 한가득 떨어져 있던 밤송이들, 볕 좋은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이미 세상에 없는 자들의 묘, 합천호에 머무는 이름 모를 새들, 오래된 모텔을 리모델링해서 옛것과 지금의 것을 아우르는 곳으로 운영 중인 숙소의 주인장⋯⋯ 나는 이제 합천군 유전리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숙소 하나 보고 합천에서 2박 3일의 여행의 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더 이상 '합천=해인사'라는 부끄러운 말은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어쩐지 낭만적이다. 늘 그 자리에 있던 곳이지만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던 곳. 지도상 흑백이었던 곳. 그곳은 이제 봄의 기운을 조금 일찍 맞이하러 잠시 다녀온 버드나무가 많았던 남쪽의 작은 마을로 기억에 남았다. 꽃이 피듯 흑백에 컬러가 입혔다.
3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해외보다는 국내여행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국내에도 아름답고 멋스러운 곳들이 참 많다. 다녀보면 더 확신이 생긴다. 이번 합천 여행처럼 흑백이었던 곳들에 찬찬히 컬러를 입히고 싶다. 땅을 밟고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좋다. 비행기나 배처럼 절차가 까다로운 대중교통보다 내가 늘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타고 직접 운전해서 가는 것이 편하기도 하고, 섬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지냈던 사람으로서 자동차를 타고 한 지역을 벗어나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기도 하다. 남북이 통일이 되어 차를 타고 북쪽으로 다닐 상상을 하면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동거인이 가끔 업무상 출장으로 외국을 다녀오는데 내게는 참 다행인 일이다. 일을 겸하기는 하지만 이국의 분위기를 스치고 오는 것만으로도 동거인의 일상에 환기가 되는 듯 보여 당분간 국내파를 고수하는 나로서는 마음의 부담을 조금 덜었다.
합천에서 2박을 무탈히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전에 잠시 들렀다. 대전은 집으로 가는 길의 중간지점이었고, 따로 시간을 내서 여행하기에는 기약이 없고, 성심당은 대전에만 있는 빵집이고, 우리는 너무나도 빵에 진심인 빵덕후이기 때문이다. 성심당의 시그니처 튀김소보로는 대전에 사는 혹은 대전을 다녀온 지인에게 몇 번 선물 받은 적이 있어서 맛있는 것도 알고 유명한 것도 안다. 그래서 몰랐다. 아니 잊고 있었다. 나도 동거인도 직접 성심당의 빵을 골라서 먹어본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아마 우리 같은 사람들 꽤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성심당 본점에서 구워져 나오는 수많은 빵들 중 꼭 시그니처 빵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취향의 빵을 직접 고르고 싶었다. 단팥빵, 버터빵, 소시지빵, 후렌치파이, 슈크림빵. 취향이 너무 적나라했나? 좋아하는 빵들이 참 고전적이다. 여하튼 빵은 당연히 구매한 날 다 먹었다. 엄청 대단한 맛은 아니었고, 기대를 많이 하면 실망도 크다는 진리에 적극 동의하는 편이라 적당히 기대하고 맛있게 잘 먹었다. 하지만 우리는 맛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을 해결했다. 내가 직접 고른 빵을 먹었다는 것. 대전에 체류한 시간이 1시간도 안 됐을 테지만 이번 여행에서 아주 즐거웠던 한때로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니 역시 집처럼 편한 곳은 없다는 고정 레퍼토리를 읊는 우리들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행도 집도 모두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여행의 짐들을 정리하고, 잠시 여독을 풀며 쉬다가, 이 짧은 여행에도 뒤풀이는 필요해서 치킨 한 마리 포장하고 와서 맥주도 한잔 마시면서 여행을 여운을 만끽했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지도를 핀다. 우리의 지도에 색을 입힐 다음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찬찬히 살피며 맥주 한 모금을 꼴깍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