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생활자의 걷기
꽃바람 날리는 이 봄의 나의 일평균 걸음수는 2023년 4월 10일 오후 4시 기준 20,837보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내가 걸음수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다. 스마트폰 사용자로서 활동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어서 알게 된 숫자일 뿐이고, 그저 산책덕후라서 그렇다. 아무리 산책덕후여도 그렇지, 여행을 간 것도 아니고 매일 2만 보 이상을 걷는 것이 가능한가 묻고 싶은 5천 보도 겨우 채우며 사는 바쁜 현대인들, 이해한다. 나도 직장(걸어 다니면서 업무를 해야만 하는 업종에 종사한다면 조금 다른 문제겠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에 다닐 때는 퇴근길에 팟캐스트라도 들을 겸 의도적으로 걸어 다니지 않았다면 만보도 채우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걷기가 가능한 것은 바쁘지 않아서다. 나는 이제 퇴사 2개월 차에 접어든 시간 부자이니까.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하고, 축복받은 재택근무자라면 몹시 애를 써서 미션 수행하듯 가능할 수도 있는 지금의 나의 하루 루틴은 이렇다. 잠에서 깨자마자 양치질만 하고 밖으로 나가 인적 드문 조용한 동네를 4km 달린다. 늦은 아침 혹은 이른 점심식사를 하고 햇볕을 쬘 겸 도서관이나 마트, 카페 등 목적지를 두거나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한두 시간 산책을 한다. 해가 지기 전 정상이 200m가 되지 않는 동네 야트막한 산을 다녀온다. 요즘처럼 봄밤의 분위기가 아쉬운 날에는 오후 10시가 넘어서도 내일의 나를 걱정하지 않고 잠시 산책을 하기도 한다. 걷는 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 하루에 세네 번에 걸친 산책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매일의 걸음수에 따라 포인트를 적립하는 앱을 실행하여 미션을 수행함으로써 걷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의 형태로 이어진다. 몇 년 전, 앱테크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나에게 가깝게 지내던 직장 동료가 걷기 생활 예찬자인 나에게 필요한 앱이라며 '캐시워크'를 추천한 것으로 나의 앱테크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 후 출석체크를 하거나 퀴즈를 푸는 방식의 앱들을 통해 다양한 앱테크를 이어가고 있으며, 걷기와 관련해서는 '캐시워크' 외에 CJ 멤버십앱에서 시행하는 '원워크'와 현재 거주 중인 용인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언택트 생활체육 미션 '쌩쌩쌩 챌린지'도 올해 추가하여 진행 중이다. 앱테크를 위해 애써 걸음수를 채우는 게 아닌가 싶은 주객전도 되는 날도 아예 없지는 않지만, 보상이 없다면 걷지 않을 텐가 묻는다면 절대 아니기 때문에 걷기는 자본주의와는 별개로 나의 즐거운 취미생활이다. 앱테크는 좋아하는 걸 했더니 보너스처럼 따라오는 기분 좋은 결과이므로 앞으로도 잘 활용할 생각이다. 돈보다는 기분의 문제랄까.
앞서 이야기 한 시간적 여유나 앱테크가 나의 걷는 생활의 외부적 요인이라면 취향의 측면에서 몇 가지 요인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나는 웬만한 거리는 차를 타기보다는 걸어 다니는 것이 편하다. 차키를 챙기고, 시동을 걸어 여러 신호를 받으며 목적지에 도착해서 주차할 장소를 물색하고 주차를 해서 차의 시동을 끄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매우 번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모든 과정을 실행할 바에야 걸어서 1시간 이내인 곳은 그냥 걸어가고 싶어 진다. 둘째로, 동네의 분위기와 일상을 관찰하고, 변화를 발견하면서 '우리 동네'를 사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지난겨울 잎이 다 떨어져 가지만 앙상했던 집 앞 나무에 첫 잎이 돋는 것을 알았다면 그건 분명 걷다가 봤을 것이다. 길냥이들이 굶지 않도록 사료와 물을 담은 밥그릇을 두는 곳, 작은 슈퍼마켓 앞을 지날 때 알게 되는 오늘의 할인상품들, 조용한 동네 놀이터가 시끌벅적해지는 시간, 점심시간인데도 손님이 너무 없어 걱정을 하게 만드는 식당, 오랫동안 임대문의 표지가 걸려 있던 빈 상가에 인테리어 공사가 시작되고 어떤 가게가 들어올지 궁금해서 자주 살펴보게 되는 마음, 흙을 밟고 싶거나 흙냄새를 맡고 싶은 날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산길 등 이런 것들은 동네를 천천히 걸어 다니며 알게 되는 것들이다. 셋째로, 걸을 때 팟캐스트라든가 음악이라든가 이미 봐서 익숙한 드라마 같은 것들을 '듣는 걸' 좋아한다. 집에서도 음악을 틀어놓기는 하지만 BGM의 역할에 충실한 정도라면, 무언가 집중해서 듣는 시간은 주로 이동할 때에 가능해진다. 걷는 시간이 늘면 음악을 듣는 시간도 늘고, 플레이리스트를 하나라도 더 만들게 된다. 반대로 걷는 시간이 줄면 구독 중인 팟캐스트 채널에 재생되지 못한 에피소드들이 쌓여 간다. 넷째로, 날씨와 계절에 따른 기분을 즐기고 싶다. 입춘은 지났지만 여전히 겨울처럼 추웠던 산책길에 매화꽃과 개나리꽃이 피기 시작한 걸 발견했을 때 마음의 온도가 1도쯤 상승했던 기분, 봄비가 내릴 때 떨어지는 벚꽃이 아쉬우면서도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며 산책할 때 느꼈던 호사스러운 기분, 곧 4월 중순인데 어젯밤에도 롱패딩을 입고 밤마실을 다녀오며 4월까지는 드라이클리닝을 맡기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기분, 벚꽃이 지니 세상 모든 꽃들이 진 것처럼 굴었지만 소란스럽지 않게 천천히 피고 있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을 보며 조금 부끄러워지는 기분. 이런 기분들을 모르고 살고 싶지 않다. 마지막으로, 20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웃픈 현실인데, 나이가 들수록 배부른 상태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너무 불편하다. 그래서 하루 3끼를 다 챙겨 먹지 않더라도 뭘 배불리 먹었으면 걸으려고 노력한다. 걷는 것만으로 속이 한결 편해지는 개운한 느낌이 참 좋다. 너무 배부르지 않게 적당히 먹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누군가 이야기한다면 딱히 반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게 가능한가요?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걷는 걸 좋아하는 나를 설명하는 것이 참 구구절절하다. 그냥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이유가 이렇게나 많았구나 새삼스럽다. 직장인으로 지낼 때는 주로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을 활용해서 걸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염 또는 한파에도 걸었다. 직장 동료들이 그런 나를 신기하게(?) 봤던 것 같기도 하고, 뭘 그렇게까지 하냐며 이상하게(?) 봤던 것 같기도 하다. 퇴사 후에는 마음껏 내가 걷고 싶은 시간에 걷고 싶은 장소를 선택해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매번 포털사이트에서 ‘걷기 좋은 길’ 같은 검색어를 이용해서 장소를 물색하고, 거기까지 먼 걸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집 근처에 나만의 코스를 몇 개 정해 놓고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내키는 대로 걷는다. 그리고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한 거였는데…’
'빨리빨리'로 국민성을 설명할 수 있는 한국사회에서 시간을 내어 걷는다는 것. 그것은 누군가에게 시간 낭비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효율이 최고인 시대에 자동차, 전기자전거, 전동킥보드 등이 주변에 널렸는데 시대를 역행하는 행동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게다가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걷기 위해 집에서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왕복 코스를 굳이 왜 하는 것인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걷는 것 자체로 건강에 득이 될 수 있는 사례도 있겠으나 그런 말을 굳이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걷고자 하는 마음이 그런 이유에서 오는 것은 아니니까. 누군가에게 걷기를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걷기 싫은 개인의 취향도 존중하고 싶다. 걷는다는 것은 매우 개별적인 행위이고, 그저 오랫동안 나의 정체성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어버린 걷는 생활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나에게 걷기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어딜 가기 위해 걸을 때도 있지만 걷기 위해 걸을 때가 더 많다. 특히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있을수록 이 패턴은 더 뚜렷해진다.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생각해 봤는데 별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다. 횡단보도 같이 걷기의 속도를 방해하는 것들이 있는 길은 가급적 피한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걷는다. 산 둘레길 같이 나무가 우거진 흙길을 걷는 것은 특히 좋다. 소실점이 아주 먼 쭉 뻗은 길을 좋아하지만 대로변을 빼고 나면 그런 길은 별로 없어 아쉽다. 편한 사람과 함께 둘이서 걷는 것도 좋지만 혼자 걷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얕은 오르막길을 좋아한다. 집에서부터 시작해서 동네를 슬슬 걷다 보면 내가 오늘 하루종일 걸어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라고 적당히 생각을 끊어낸다. 주말 아침 이른 시간에 나가서 하는 산책은 특별히 더 고요해서 매력적이다. 걸을 때는 스마트폰과 무선이어폰만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주로 외투 주머니를 활용하고, 여름에는 작은 슬링백을 활용한다. 걷다가 가끔은 길가에 핀 야생화를 꺾기도 하고, 솔방울이나 나뭇가지 같은 것을 주워 오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혹은 타 지역에 머무를 기회가 생기면 일단 그 동네를 걸으며 산책 코스를 물색한다. 올해 가장 많이 걸었던 날은 만우절인 4월 1일이고, 그날 40,375보를 걸었다. 음, 이렇게 계속 쓰다가는 걷는 생활에 대해 끝도 없이 주절거릴 것 같아서 그만하고 마무리모드로 들어가 보면, 걷기는 나에게 생필품 같다. 없으면 안 되는 것. 지금도 이 글을 쓰느라 오래 앉아 있었더니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걸으러 나가야겠다. 도서관에 가서 예약한 도서를 찾아야 하고, 양파와 파프리카를 사러 가야 하고, 저녁엔 동네 뒷산에도 올라야 하니 아마 오늘도 20,000보는 거뜬히 채울 것이다. 걸음을 채우는 것, 하루를 채우는 것, 마음을 채우는 것. 모두 일맥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