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쩌다 김밥이 아무튼 김밥으로

다시 만난 김밥

by 이현

MBC 예능 <전지적 참견시점>의 이영자의 묵은지 김밥, 2022년 방영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 김밥, 최근 시작한 tvN 예능 <서진이네>는 멕시코에 가서 분식집을 운영하며 정유미가 마는 김밥을 팔고 있다. 온라인콘텐츠창작자 소위 크리에이터라고 불리는 유튜버 중 먹방으로 꾸준한 팬덤을 형성 중인 '입짧은햇님'은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재료를 준비해 김밥을 직접 싸고 썰어서 먹는다. 먹방이 유행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여행도 식도락이다.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 곳곳의 김밥 맛집 도장 깨기는 이미 보통사람들의 여행에서 필수코스이고, 특히 제주도의 '오는정김밥'은 김밥을 사기 위해 수십, 수백 통의 전화통화를 시도해서 예약을 하고 사 먹었다. 그나마도 이제는 전화예약이 아니라 무조건 방문 예약을 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변경되어 돈을 받고 대리예약을 하는 사람들마저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다. 김밥순례 운영자이며 김밥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인플루언서 @gimbapzip은 인스타그램에서 2023년 3월 말 기준으로 팔로워가 9만 7천 명에 달하고 있다. 이쯤 적어놓고 보니 언제 이렇게 김밥이 대세인 세상이 되었나 싶다.


본가에서 독립하기 전에는 자주는 아니었지만 일 년에 한두 번은 소풍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엄마가 싸주신 김밥을 먹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엄마표 김밥이다. 김밥은 내가 만들 수 있는 범주의 음식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의 노동이 필수적이었다. 철없던 나이에도 김밥 만드는 것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드는 일인지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만 먹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마트에서 김밥 재료를 사는 것으로 시작되는 김밥 만들기의 과정은 이렇다. 평소에는 여러 가지 잡곡을 섞은 찰진 밥을 먹는 집이지만 김밥을 싸는 날만큼은 고슬고슬한 김밥용 된밥을 짓기 위해 깨끗한 압력밥솥에 뽀얀 백미만을 앉혀 가스레인지의 불을 켠다. 밥이 익어가는 동안 김밥에 들어가는 속재료를 준비할 차례다. 엄마표 김밥에 주로 들어가는 재료는 단무지, 햄, 맛살, 어묵, 계란, 오이, 당근이었다. 당근을 싫어하는 막내 동생을 위해 몇 줄은 당근이 들어가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 같다. 중, 고등학생 시절 김밥을 밖에서 사 먹기 시작하면서 재료에 따라 김밥 맛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을 경험한 후로 참치, 치즈, 마요네즈, 깻잎 같은 재료를 추가해 나갔다. 각각의 재료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팬에 볶아준다. 독립해서 혼자 김밥을 만들기 전까지 내가 이 작업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김밥 싸기의 가장 귀찮고 손이 많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다 볶아낸 재료를 쟁반에 줄 세우듯 옮겨 놓는다. 속재료 모두가 저마다의 맛을 갖고 제 역할을 하지만, 계란은 특별하다. 날계란을 툭툭 까서 하염없이 휘젓다가(주로 계란 풀기 같은 일은 내 담당이었다.) 적당히 달군 팬 위에 잘 섞인 계란을 올리면 동그랗고 노란 계란지단이 만들어지는데 나는 그때 김밥 속재료의 스타는 계란지단이라고 생각했다.


속재료 준비가 끝날 즈음, 치익-치익- 소리 내는 압력밥솥의 불을 끄고 적당히 뜸을 들인다. 뜸을 너무 많이 들이면 밥이 질어질 수 있으니 엄마의 판단하에 '적당히'가 항상 중요하다. 구체적인 시간이나 양 같은 건 없고, 모든 것을 '적당히'로 에두르는 것, 그렇지만 그 '적당히'로 만든 음식이 대부분 너무 맛있다는 것이 엄마 요리의 특징이다. 밥솥 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잘 익은 흰쌀밥을 서걱서걱 저어 보면서 밥주걱에 묻은 밥알 몇 개를 떼어먹어본 엄마의 “밥 잘 됐네.” 이 말이 나는 참 듣기 좋았다. 성공의 기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김밥용 밥은 간이 필요하다. 단촛물이라고 하는데, 식초와 설탕을 섞은 것에 소금을 약간 넣어 간을 한 물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게 김밥의 맛을 확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언젠가 혼자 김밥이 먹고 싶어서 단촛물 없이 그냥 맨밥으로 만든 적이 있었는데 내가 알던 맛이 아니어서 매우 실망했던 적이 있다. 엄마는 언제나 정확한 계량을 하면서 음식을 만드는 법이 없었고, 단촛물도 식초, 설탕, 소금을 '적당히' 넣고 맛을 보는 방식으로 엄마만의 간을 만들어 갔다. 갓 지은 밥에 단촛물을 섞고, 화룡점정으로 참기름을 충분히 둘러 밥 전체에 양념이 잘 배도록 섞어 주면 준비가 다 끝났다. 김밥을 말 준비.


부엌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엄마는 두툼한 나무도마 위에서 김밥을 말고, 나는 적당한 사이즈의 쟁반 위에서 김밥을 만다. 김밥용 김은 주로 10장 묶음으로 시판되기 때문에 김밥은 한번 말 때 10줄이 기본이다. 가끔 전에 김밥을 만들다가 남은 김이 있다면 보너스로 몇 줄 더 쌀 수 있다. 김을 한 장 펼치고, 그 위에 밥만 먹어도 이미 너무 맛있는 간이 잘 된 밥을 얇게 펴 바른다. 밥을 예쁘게 올리기 위해서는 신속함과 세심함이 필요하다. 김 위에 골고루 밥을 펴 바르지 못하면 김이 말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눅눅해진다. 그래서 일단 빨리 전체적으로 밥을 펴 바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는 밥 위에서 주걱과 손을 사용해서 너무 두껍게 올라간 곳과 밥이 비는 곳을 찾아 적절히 매만져준다. 김 위에 네모반듯하게 밥이 잘 올려지면 일단 반은 성공이다. 이제 하나하나 볶아냈던 재료들을 밥 위에 올린다. 깻잎을 넣을 생각이라면 다른 재료들 전에 깻잎 두장을 먼저 올리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단무지, 계란, 어묵, 햄, 맛살, 오이, 당근 같은 재료를 하나씩 줄 맞춰 올려주고 밥이 찰싹 붙어 있는 김으로 돌돌 말면 된다. 이때 줄 세운 재료들이 조금 흐트러질 수도 있으나 너무 염려 말고 재료가 튀어나오지만 않도록 양손에 쥐어지도록 말아낸다. 길고 탄탄하며 매끈하게 잘 말린 첫 번째 김밥이 완성된다. 이것은 시식용이다. 김밥은 다 만든 후에 먹는 음식이 아니니까. 만드는 동안 손으로 하나씩 집어 우걱우걱 먹어야 하고, 그때 먹는 김밥이 가장 맛있다. 첫 번째 만 김밥을 먹기 좋게 썰어서 손이 잘 가는 곳에 둔다. 아, 이 맛이다. 그렇게 한 줄 한 줄 말다 보면 어느새 끝이 보인다. 남은 재료를 다 넣고 만드는 마지막 김밥은 가장 두툼하고 맛있을 수도 있지만, 남은 재료가 어쩐 일로 숫자가 맞지 않았다면 가장 알량한 것일 수도 있다. 때로는 밥이 모자라서 재료를 다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이때는 남은 재료를 반찬으로 먹으면 된다. 김밥 말기의 변수는 늘 있다.


4줄, 3줄, 2줄 이렇게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린 9줄(1줄은 이미 썰어서 먹었기 때문에)의 김밥을 보고 있으면 어찌나 뿌듯한지. 평소 잘 쓰던 칼이지만 김밥을 썰기 전에 다시 한번 슥-슥- 갈아준다. 잘 말린 김밥도 썰다가 김밥 옆구리 터질 수 있으니 칼의 성능이 중요하다. 5줄 정도 적당히 썰어서 성을 쌓듯 동그란 김밥을 하나하나 접시 위에 올린다. 맨 위 자리는 꼬다리들이 차지한다. 김치나 계란국 같은 것들을 곁들여 온 가족이 둘러앉아 김밥을 먹는다. 인당 적게는 1줄에서 많게는 3줄까지 먹다 보면 배부르단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고, 이제는 더 이상 못 먹겠다며 식사가 끝이 난다. 그럼 남은 김밥까지 다 썰어서 다시 김밥 성을 쌓아 랩으로 마르지 않게 싸서 주방 식탁 위에 놓아두는데, 이때부터 소소하지만 재밌는 일이 펼쳐진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들 부엌에 갈 일이 많아진다. 그때마다 김밥 하나씩 오물오물거리면서 부엌을 나오고 다시 하던 일을 하고, 잠시 후 또 부엌엘 간다. 식탁에 앉아서 먹는 것도 아니고 커피바에서 에스프레소 샷 한잔을 입에 털어 넣듯 김밥 한두 개 오물오물거리고 다시 또 나온다. 그렇게 하루종일 김밥을 먹게 되는 경험을 하고야 만다. 부엌을 들락날락거리다가 엄마와 눈이 마주치면 괜히 머쓱해져서 "이게 마지막이야."라고 김밥을 문 입으로 귀여운 거짓말도 했다. 5인 가족에게 김밥은 10줄을 쌌어도 내일까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자칫 이날 외출이라도 하게 된다면 남은 김밥 같은 건 기대하면 안 된다.


김밥 싸는 날의 풍경을 글로 풀었을 뿐, 아직 김밥에 대해 할 이야기가 남은 걸 보니 내가 김밥을 정말 좋아하기는 하나보다. 김밥 이야기를 하는데 소풍이 빠지면 섭섭하니까 조금만 더 이어보자면, 해마다 봄, 가을 소풍 가는 날은 공식적으로 김밥을 먹는 특별한 날이었다. 그날만큼은 엄마가 꼭 김밥을 싸주셨다. 동생들과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김밥을 먹을 수 있는 날도 더 많아져서 또 좋았다. 날씨 좋은 봄, 가을날에 친구들과 잔디밭에 옹기종기 앉아서 각자의 도시락 뚜껑을 열어 저마다의 김밥을 구경하며 기분 좋게 먹었던 때가 기억난다. 그 후로 오랫동안 김밥은 날씨 좋은 날에 야외에서 먹는 즐겁고 설레는 음식으로 남아 있다.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한 후부터 김밥은 이제 엄마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사 먹는 음식이 되었다. 주로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들 때 김밥 한 줄 후딱 사서 손에 들고 먹는 용도로 김밥을 먹었다. 회의하면서 가볍게 식사를 겸해야 할 경우에도 김밥은 주 메뉴였다. 그러면서 점점 김밥은 전처럼 즐겁고 설레는 음식의 범주에서 밀려났다. 내가 먹는 한 끼라도 실패하고 싶지 않은 시대를 살며 김밥은 좋아하는 음식이었지만 대충 먹고사는 기분이 들어 멀리 두고 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혼자 있을 때는 의도적으로 멀리하던 음식이 본가에 갈 때마다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되었다. 엄마가 싸 준 김밥. 하루종일 먹어도 질리지 않던 그 김밥.


자연스레 멀어진 어릴 적 친구를 아주 오랜만에 우연히 만나 전보다 더 가까워지는 사이가 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지난해 김밥이 나에게 그런 친구 같은 존재였다. 업무상 변화가 원인이었다. 성남시 끝자락에 위치한 우중충한 산업단지에서 분당 판교로 출근지가 바뀌었다. 외부 환경은 더할 나위 없었으나 사무 공간이 매우 답답한 곳이었다. 점심시간만이라도 좁은 실내를 벗어나 탁 트인 야외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다행히 판교라는 지역 특성상 공원이 많고, 산책하기 좋은 곳들이 많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했다. 식당에 앉아서 밥을 먹는 횟수가 줄어드는 만큼 분식집 김밥을 포장해서 공원으로 가는 횟수가 늘어났다. 봄, 여름, 가을 동안 공원 벤치에 앉아 김밥 한 줄 먹으면서 혼자 책을 보거나 팟캐스트를 듣거나 영상을 보면서 점심시간을 즐겼다. 그동안 대충 먹는 음식으로 여겨왔던 김밥이 다시 즐겁고 만족감을 주는 음식이 되었다. 그렇게 김밥을 자주 먹다 보니 늘 먹던 기본이나 치즈김밥에서부터 참치, 돈가스, 멸추, 묵은지 등등 다양한 김밥을 시도하면서 김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제는 꼭 날씨가 좋은 날에만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뭐 먹고 싶어?"라고 물어보면 1순위로 생각나는 음식이 됐다. 가끔 집에서 김밥을 만들기도 한다. 사실 오늘 이 글을 쓰는 것도 어제 김밥을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편과 산책을 하다가 “여기서 김밥 팔면 장사 잘 될 것 같지 않아? 내가 해볼까?” 같은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대화도 나누는 지경이다. 근데 정말 잘 팔릴 것 같은데 수지타산이 맞는지 계산 좀 해봐야겠다. 어쩌다 김밥이 아무튼 김밥이 된 요즘, 김밥이 너무 좋다. 매일 김밥 먹으면서 살아도 좋을 것 같다. 김밥이 질리는 날이 과연 올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달리기의 원동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