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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 Jan 14. 2020

자만과 오만

나는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

 2월의 새벽 공기는 너무나 차갑고 쌀쌀했다. 나는 새벽 5시 50분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밥을 먹은 뒤 통학 버스를 타기 위해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숨을 한 번 들이킬 때마다 폐 속 깊은 곳까지 하얗게 냉각되는 느낌이었다. 어두컴컴한 거리에는 아무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지만 오직 나만이 하이얀 입김을 내뿜으며 이 거리에 첫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재수를 열심히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다시 공부를 시작 한다한들 고등학생 때처럼 열심히 할 자신이 없었으며 지난 수능 때의 나의 모습을 돌이켜보았을 때 아무리 공부를 잘했다고 한들 온전한 나의 실력을 발휘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버지께는 공부를 안 했다는 얘기까지 들었으니 공부를 해야 할 의욕이 생길 리 만무했다.               



 그리고 막연히 아무리 못 봐도 지금보다는 잘 보겠지라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감보다는 낙관에 가까웠다. 내 평생 그렇게까지 모의고사를 못 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 날은 잠을 잘 자지 못해서, 두통이 심해서, 긴장을 많이 해서 제대로 내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걸 거야. 그렇게 나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고등학생 때는 핸드폰도 없었고 여행도 가지 못했고 영화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재수하면서는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여가를 조금씩 즐기면서 살자. 주말에는 영화도 보고 가끔씩은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 이제는 고통에서 벗어나 조금은 사람다운 삶을 살자. 그것이 내가 처음 재수를 시작할 때의 마음가짐이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재수학원.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수험생들의 수준은 불 보듯 뻔했다. 그동안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치여 살았던 것과 달리 여기는 어떻게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지 싶은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곳에서 과연 내가 재수를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수능을 못 봤을 뿐이지 모의고사는 잘 봤었는데 ······.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오만이 찔끔찔끔 겉 피부를 뚫고 올라왔다. '나는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온 뇌를 지배했다. 하지만 이곳은 내가 그런 생각을 계속 유지할 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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