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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 Jan 21. 2020

A Day

기적은 없다

 오늘의 날씨는 생각 외로 그렇게 춥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5시 50분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은 뒤 간단히 세면을 하고 TV를 켰다. 뉴스는 온통 오늘 있을 수능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 날씨부터 시작해서 수능 시험 출제방향에 관한 평가원장의 인터뷰까지. 가볍게 방송 내용들을 흘려들은 다음 나는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챙기고 시험장에 갈 준비를 했다.          


     

 시험장은 미리 갔다 와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10분 정도를 이동해 시험장에 도착했다. 학교 앞은 늘 그렇듯이 수험생들을 응원하는 가족들과 후배들로 가득했다. 나는 아버지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홀로 교실에 들어갔다.               



 내 자리는 전 날 예비소집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 공부하던 책들과 필기 노트를 꺼내놓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염치없이 수능 대박을 바라지는 않겠다. 내가 그동안 투자했던 시간과 노력들, 딱 그 정도까지만 결과로 보여주어라. 나는 긴장을 놓지 않으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공부하던 책을 보거나 필기노트를 읽더라도 집중은 전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으니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        


       

 시험시간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예비 종이 울리자 감독관이 시험지를 나눠주시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받은 시험지가 내가 보아야 하는 시험지와 동일한지 확인했다. 「국어 A형」. 잘못된 시험지를 받았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미리 확인하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아찔했다. 나는 감독관을 불러 시험지 교체를 요구했고 감독관은 잘못된 시험지를 확인한 후 시험지를 교체해주었다. 큰일 날 뻔했다. 제대로 된 시험지를 받았음에도 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 보는 시험은 평소에 보던 모의고사 시험과 다를 바 없는 시험이다. 괜히 오버하지 말고 항상 하던 대로만 하자. 마음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일주일 전 혼자만의 리허설을 진행했던 대로, 지난 일 년 간 수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던 그대도만 하자.          


     

 첫 교시 국어시험의 시작.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첫 페이지를 넘기고 바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작년에도 그러했듯 수능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화법 파트 지문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러나 작년과 달라진 점은 그것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지문을 읽을 수 있는 담대함을 키웠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지문을 읽어나갔다.               



 화법·작문 파트는 평소 모의고사보다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답을 적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문법 문제에서 나는 첫 번째 고비를 맞이해야만 했다. 본래 수능은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는 통념이 강했었는데 이번에는 문법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풀기 어려운 문제가 출제된 것이다. 문법 문제 두 문제를 고민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니 자연스레 마음이 불안해졌다.               



 '수능 날 어렵거나 모르겠는 문제가 나와도 너무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그냥 넘어 가.'               


 그 전 날 친구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모르는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모르는 문제가 있어도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나머지 문제들을 풀어라. 초조했던 그 순간 떠오른 친구의 조언이 나를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했다. 나는 친구의 조언을 다시금 되새기며 어려운 문법 문제 두 개 위에 별표를 그린 후 바로 다음 문제들로 넘어갔다.           


    

 비문학과 문학 지문은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다. 신채호, 슈퍼문, 무형탑 등등 모든 지문들이 어려운 어휘와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고 지문을 읽고 문제를 푸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작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조급해하지 않고 지문 독해를 내 페이스대로 진행했지만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이쯤 되니 불안감보다는 오히려 평온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1년 남들보다 더 공부했음에도 달라진 것이 없구나. 그동안 내가 공부해온 시간들, 닳고 닳은 필기노트, 빽빽한 플래너, 포기해야만 했던 수많은 인연, 절제된 삶. 과거를 돌이켜 보아도 그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 자신의 역량에 대한 인정과 함께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만 하자. 그것이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쳐 힘들게 문제를 다 풀고 나니 약 3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평상시 10분 이상의 시간이 남아있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촉박한 시간이었다. 나는 빠르게 시험지 답을 OMR 답안지에 체크한 뒤 별표를 쳐놓았던 문제들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아직까지도 헷갈리는 선지들. 고민 끝에 내가 체크한 것이 맞기를 바라며 답안지에 마지막으로 정답을 체크했다. 결국 나는 가답안지조차 작성하지 못한 채로 시험지와 답안지를 제출했다.            


   

 국어시험의 여파는 굉장했다. 감독관이 나서자 교실은 탄식과 한숨소리로 가득했고 모두가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그나마 나 혼자 어렵게 느꼈던 것은 아니라는 걸 확인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주변 수험생들로 인해 긴장감과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귀에 이어 플러그를 꽂고 필기노트를 꺼낸 후 다음 시험인 수학을 준비했다.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나니 수능이라서 생기는 불안감은 많이 사라졌다. 운이나 기적 같은 것에 기대지 않고 내가 지금까지 쏟아 온 모든 것들이 나를 증명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설혹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실망하거나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평소대로 하던 만큼만 하자. 그뿐이었다.               



 수학 시험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려워서 별표 치고 넘어간 21번과 30번 문제를 제외하고는 그렇다 할만한 문제가 없었다. 나머지 문제들을 다 풀고 나서도 약 6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으니 여유롭게 고민해도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나는 계속 안 풀리는 21번 문제를 남겨두고 30번 문제를 먼저 풀었다. 마지막까지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21번 문제. 억지스러운 방법으로 풀어 나름대로의 답은 체크해놓았으나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일단 나는 나머지 문제들을 3번 정도씩 하나하나 다 검토한 뒤 다시 한번 그 문제를 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순조롭게 풀렸다. 다행이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모든 문제를 검토한 뒤 OMR과 가답안지에 정답을 체크했다.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시험 종료 후 시험지와 답안지를 제출하니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점심식사 시간은 여느 고등학교 점심시간과 다를 바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 다들 시험 얘기와 함께 도시락을 먹고 있었지만 나는 1주일 전 연습한 대로 귀에 이어 플러그를 꽂고 1주일 전과 똑같은 메뉴의 도시락을 먹었다. 딱 허기지지 않을 정도까지만 배를 불린 뒤 도시락을 집어넣고 탐구 필기 노트를 꺼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손짓이 느껴졌다.           


    

"윤아, 뭐해?"               



 고개를 드니 작년까지 나와 같이 공부하던 고등학교 동창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 나가 친구를 껴안았다. 우리는 서로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재수는 어디에서 했는지 소소한 이야기를 하며 점심시간 동안 서로의 긴장을 달랬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오늘 본 시험에 관한 얘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능이 끝나고 다시 보자는 말과 함께 헤어졌다.        


       

 영어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듣기 평가 방송 소리가 울리자 다시금 몸이 긴장을 되찾았다. 나는 작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중간중간 독해 문제로 넘어가지 않고 듣기 평가 문제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다행히 듣지 못했거나 헷갈리는 문제없이 듣기 시험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영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장 고난도 문제 유형인 빈칸 추론 문제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답이 눈에 보였고 대부분의 문제가 분명한 답을 유추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출제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영어를 가장 어려워했기에 걱정이 많은 과목이기도 했는데 쉽게 출제되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나는 OMR 카드와 가답안지에 정답을 체크한 뒤 여유 있게 답안지를 제출했다.               


 영어시험까지 끝나고 나니 주요 과목 시험이 모두 끝났다는 생각에 약간 긴장이 풀렸다. 작년에도 그러했지만 나머지 과목들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 상황에서 다시 긴장을 되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귀에 이어 플러그를 꽂은 채로 탐구 필기노트를 공부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제2외국어 시험까지 다 끝마치는 그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 마음을 다잡기 위해 계속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탐구 시험과 제2외국어 시험의 난이도는 그저 무난했다. 한국사의 경우에는 조금 어렵게 느껴지긴 했지만 멘탈을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고 사회문화는 평소 난이도와 비슷했다. 제2외국어 베트남어 시험의 경우는 허수 응시자들에 의해 시험장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것을 제외하면 난이도는 생각보다 쉬웠다. 6평, 9평을 볼 때에는 아예 읽지 못하는 문제가 대다수라 매번 낮은 점수를 받았었는데 이번에는 잘 모르겠는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했다. 시험 시작 5분 만에 엎드려 자는 이가 대다수였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기 위해 끝까지 집중했다.        


       

 수능이 모두 끝나자 시험장은 잔잔한 탄식과 해방감으로 들뜬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끝났구나. 몸에 있던 모든 긴장이 한 번에 풀렸다. 나는 시험장 밖으로 뛰쳐나가는 수험생들을 한동안 지켜보며 수능이 끝난 후 느껴지는 약간의 허무함을 즐겼다. 모든 필기구와 노트, 그리고 수험표를 챙기고 교실을 나와 정문 밖을 향하니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아!"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출근 복장을 입고 있는 아버지가 계셨다. 야간 근무 출근을 하셔야 할 시간이기에 수능 끝난 후엔 혼자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말을 해놨었는데 아버지께서 나를 혼자 남겨두지 않기 위해 직장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 데리러 오신 것이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아버지를 보자마자 껴안았다.            


   

 아버지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수능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국어가 어려웠다는 얘기 정도뿐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로 컴퓨터를 켜고 가답안지를 작성하지 못한 수능 국어 B형 홀수형을 다운로드하여 인쇄했다. 시험지를 봐도 내가 체크했던 답이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아 걱정했는데 다행히 보자마자 모두 기억이 났다. 나는 수험표 뒷면에 있는 가답안지에 답을 모두 옮긴 후 어머니가 퇴근하시기 전까지 잠시 소파에 누웠다.           


    

 어머니를 기다리며 모두 작성한 가답안지로 채점을 할지 말지 고민했다. 수능 성적이 너무나 궁금해 당장 채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바로 논술 수업을 들으러 학원에 가지 않고 채점을 지금 해버리면 지난 수많은 날들 동안 이미지 트레이닝했던 것과 어긋나 버리기에 부정이 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충동을 참았다. 매일 그래 왔듯 오늘도 평범한 하루일 뿐이므로 괜히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계획대로만 하자. 나는 학원에 가서 채점하기로 마음먹고 어머니와 함께 승용차로 매일 가던 그곳을 향했다.               



 내가 재수학원에 도착한 때는 이미 수능이 끝난 지 꽤 긴 시간이 지나있는 상황이었다. 불이 꺼져있는 쓸쓸한 교실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고 옆 강의실에서는 논술 수업을 하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혼자 남아있는 교실. 그곳에서 나는 교실 뒤편에 널브러져 있는 답안지들을 모아 국수영탐 순으로 정리했다.               



 맨손으로 채점을 하려고 하니 너무 긴장되고 손이 떨려왔다. 작년처럼 컴퓨터가 해주면 좋으련만. 나는 채점을 하기에 앞서 먼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가 지금까지 노력해온 모든 것들이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뿐이니 무슨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이자. 나는 먼저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인 수학 답안지를 꺼내 가답안지 옆에 놓았다. 빨간색 펜을 들어 문항과 답안을 확인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채점을 시작했다.               



 백점. 다행히 자신했던 대로만 점이 나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음부터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채점을 진행했다. 영어 100점, 한국사 44점, 사회문화 50점. 두 문제를 틀린 한국사와 아직 채점을 하지 않은 국어를 제외하고는 만족스러운 점수가 나와서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다음은 수능을 보며 가장 큰 고난을 겪었던 국어의 차례였다. 도저히 바로 채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점점 커지는 심장소리와 함께 머릿속이 잠시 새하얘졌다. 수학 백, 영어 백, 한국사 44, 사회문화 만 점. 국어 성적이 아주 높지는 않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만 나와준다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대학에 지원해볼 수 있었다. 나는 펜을 든 뒤 다른 과목과는 다르게 맞은 문항에 체크하지 않고 틀린 문항만 찾아 체크하기 시작했다. 펜은 주저 없이 틀린 문항에 빗금을 그었다. 그어진 문제는 총 두 문제. 국어를 총 두 문제밖에 틀리지 않은 것이다! 무슨 문제를 틀렸는지는 따로 확인하지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고민했었던 문법 문제를 모두 맞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국어가 95점임을 확인하고는 등급 컷을 확인하기 위해 위층 교무실로 향했다.               



 "수능은 괜찮게 봤니?"     

 "등급컷을 몰라서 아직 잘 모르겠어요."      


         

 논술 수업 때문인지 아무도 없는 교무실에 내가 방황하며 돌아다니고 있자 밖에서 순찰을 돌고 계시던 생활지도 선생님이 부르셨다. 선생님께서는 등급컷을 모른다는 나의 대답에 컴퓨터 화면을 보며 등급컷을 불러주셨다. 국어 1등급, 수학 1등급, 영어 1등급, 한국사 2등급, 사회문화 1등급. 높은 성적임이 확인되자 생활지도 선생님께서 논술 수업을 하고 계시던 담당 선생님을 불러와 성적을 확인시켰다.               



 "베트남어 성적은 어떻게 나왔어?"         


      

 성적을 보며 골똘히 생각하시던 선생님이 나와 시선을 맞추며 조심스레 물어보셨다. 답안지가 없어 미처 채점하지 못했다고 말씀드리니 바로 답지를 인쇄해주셨다. 나는 선생님들이 보는 앞에서 긴장된 상태로 마지막 제2 외국어 채점을 시작했다. 점점 늘어나는 붉은색 동그라미. 모두 다 채점한 결과 나의 베트남어 성적은 만 점이었다! 6평 20점대에 9평 30점대 였기에 만점은 기대하지도 않았었는데 생각지 못한 희소식에 나도 놀랐다. 담당 선생님께서는 채점 결과를 보시고 잠시 고민하시더니 나에게 수시 지원 학교와 학과를 물으셨다.   


            

 "ㅅㄱ대 경제학과랑 ㅈㅇ대 경영학과 썼습니다."   


            

 담당 선생님께서는 곧바로 내 가채점표와 학원 입시 성적들이 기록되어 있는 서류를 번갈아 확인하시며 교무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셨다. 핸드폰으로 나의 담임선생님께 연락하시는 눈치였다. 한동안 내 성적과 입시 관련 서류들을 확인하시던 선생님은 마침내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마주치고 입을 떼셨다.     



 "집에 들어가서 쉬어."     

 "네?"               



 잘 못 들은 것 같아 재차 물었다.       


        

 "지금 성적으로도 수시로 쓴 대학은 모두 갈 수 있으니까 논술 수업 듣지 말고 학원에서 연락 올 때까지 쉬고 있어. 그동안 고생 많았다."  


             

 얼떨떨했다.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교무실 밖을 나오니 옆 강의실에서 논술 준비를 하고 있는 재수학원 동기들이 보였다. 나도 저기에 앉아있어야만 할 것 같은데···. 혼자 집에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어딘가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가 안내데스크로 갔다. 항상 반겨주시던 안내데스크 직원분께 논술 강의 환불을 부탁드리고 환불을 받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원 건물을 나와 늘 보던 그 거리를 쭉 둘러 모았다. 바쁘게 지나다니는 자동차, 한창 공사하느라 공부를 방해하던 옆 건물, 친구가 고생한다면 밥을 사주었던 스테이크 하우스, 수능 한 달 전 몸이 너무 좋지 않아 링거 주사를 맞았던 병원. 늘 보아왔던 그 풍경들이 오늘따라 어딘가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매일 보던 이 모습들을 이제는 볼 일이 없겠구나. 나는 잠시 바람을 쐬며 항상 보던 이 거리를 눈 속에 가득 담았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된 후에야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논술 강의 듣지 않아도 되니까 지금 바로 학원으로 와주세요." 


              

 알겠다고 대답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가득했지만 나에게 이유는 따로 묻지 않으셨다.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차를 끌고 오셨다. 나는 차가 보이자마자 바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논술 수업은 왜 안 들어?"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어머니께서 크게 작심하신 듯 나에게 조기 귀가하는 이유를 물으셨다. 마음속으로 어떻게 뜸 들여야 어머니를 더 놀라게 해 드릴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지만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커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다.     


          

 "수능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봐서 굳이 논술시험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대요."               



 운전석에서 차를 운전하고 계셨기에 어머니의 얼굴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기뻐하시는 표정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차를 타며 집에 돌아가는 도중에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어머니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차를 타고 돌아온 시간이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다는 것만 기억할 뿐.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나는 단 둘이서 치킨을 시켰다. 평상시에는 혼자서도 한 마리를 금방 해치웠었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치킨이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집어넣다 결국 안되자 어머니와 나는 거의 먹지 않은 치킨을 남겨두고 취침을 위해 각자 방에 들어갔다. 문을 닫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방에 들어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맞는 것일까? 눈을 감고 지난 1년을 되돌아보았다. 매일 새벽 공기를 마시며 학원 버스를 타기 위해 뛰어갔던 기억, 졸지 않기 위해 펜으로 허벅지를 찔렀던 일, 일요일 저녁마다 먹었던 어머니의 도시락, 심심할 때 마셨던 조지아 캔커피의 달콤한 맛, 갑자기 어지러워 학원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토를 했던 기억. 그동안 겪었던 모든 일들이 생생하게 눈 앞에 떠올랐다. 심장이 무척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 끝인가 보다. 지금까지 고생한 나 자신에 대해 고마운 감정이 생겼다. 그날 밤, 나는 떨리는 심장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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