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때 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을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하였고, 졸업이 1년밖에 안 남은 시점에 전학을 가기도 애매한 상황이라 시외버스를 타고 등·하원을 했다. 버스를 타면 자리에 앉아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일기장을 꺼내는 일이다. 버스에 앉아 전날 있던 일들을 일기에 적는 게 일상이었다. 라디오를 처음 접했던 것도 버스를 타기 시작하면서인 것 같다. 라디오를 들으면 사람 사는 이야기, 세상만사가 다 담겨 있었고, 그 시절 그쯤에 나의 최대 관심사는 죽음이라는 단어였다. 왜 죽어야만 하는지. 항상 의문을 품고 살았던 것 같고, 그때 일기의 주제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 단어에 꽂힐 수 밖에 없던 이유 중엔 1년전 외할아버지가 위암수술도중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아프시기 전까지는 일하시는 부모님은 주말마다 할머니댁에 우리를 보냈고, 우리를 돌보는 일은 할아버지의 전담이었다. 할아버지댁 앞에는 월대천이 있었는데 그곳이 우리의 주 놀이터였고, 할아버지는 바위위에 앉아 담배를 피시며 우리를 살폈다.
버스를 타고 가는길에는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이 있었는데, 그 쯤을 지나가며 보이는 월대천은 늘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마 지금쯤 그런 일기를 썼다면 상담실로 가서 상담을 받았겠지만, 내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죽음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던 것 같다.
아침저녁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면 창밖으로 보이는 다양한 동네의 모습들과 길위에 사람들과 간간이 보이는 도로 위에 고양이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짓눌려버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잠시. 왜 저렇게 허망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지 수도 없이 생각했다. 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외롭게 죽어갔을 고양이들을 나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기도했던 것이.
길가에 떠도는 저 친구에게는 가족이 있었겠지. 예기치 않게 떠나버린 이별에 과연 저 친구를 그리고 그 가족들을 위로해 주는 친구가 있을까. 어디서 어떻게 떠나갔는지 조차 모르게 떠나버렸다는 그 생각에 어린나이였지만 허망함을 느꼈다.
성인이 되고 운전을 하다 보면 길가에서 고양이를 만나는 일이 생기곤 하는데, 그 ‘순간’ 길 위에서는 자동차가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피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세상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상황들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아직도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길위의 고양이들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기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