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시장과 청계천 헌책방 거리 그리고 을지다방
을지로 촬영이 있기 전까지 나는 을지로를 지나쳐 보기만 했지 구석구석 둘러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촬영이 있던 당일, 나는 왠지 모를 기대감을 안고 을지로에 도착했다.
이 글은 추위가 한풀 꺾여 걸어 다니기 좋았던 어느 날, 을지로에서 만난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광장시장에서 청계천 방향으로 나오면 바로 방산시장이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일상, 누군가에게는 옛 감성을 물씬 느끼게 하는 장소일 방산시장. 인쇄, 포장 전문이라 이름 붙은 방산시장에 가장 먼저 들렀다.
방산시장에 들어서면 포장과 인쇄에 특화된 거리답게 관련 업종의 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필자는 오래된 골목이나 간판을 좋아하는데 방산시장은 그런 나의 취향을 아는 것처럼 오래된 간판들이 많았다.
방산시장에 들어서면 인쇄, 포장 관련된 간판들이 많다. 인쇄, 포장 특화 거리라는 명성에 알맞게 을지로의 한 골목에는 오늘도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정겹다.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간판은 제과 기구를 파는 공업사 간판이었다. 종합인쇄 및 포장산업 관련 전문 시장이라고 이름 붙은 방산시장이지만 제과 기구를 파는 베이커리 거리도 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는 방산시장 제과 골목인데 규모가 크지 않아서 처음 온 사람들이 바로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산시장에 대해 찾아보다 알게 된 사실 하나.
많은 사람들이 방산시장에 초콜릿 재료를 사러 온다는 사실! 방산시장을 지나며 봤던 가게들 중에서 초콜릿 재료를 판매하는 가게를 봤는데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방산시장은 도매시장이라 도매 위주로 판매 하지만 위주지만 초콜릿을 소분해서 판매하는 가게들이 있다. 덕분에 초콜릿 재료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하니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직접 초콜릿을 녹여 만들고 싶다면 방산시장에 방문해 초콜릿과 관련 재료들을 찾아보자.
초콜릿뿐만 아니라 제과, 석고 방향제 캔들 재료를 판매하는 가게도 곳곳에 보인다. 이런 메이킹 재료 관련해서 방산시장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곳이라고 하니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 방문해보는 것도 좋겠다.
방산시장을 벗어나며 잊혀가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겐 열심히 일하는 일터인 이곳에 앞으로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길 바란다.
방산시장에서 빠져나와 청계천을 따라 걸으면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이어진다. 길을 따라 동대문 방향으로 걷다 보면 작은 헌책방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데 그곳이 바로 청계천 헌책방 거리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방산시장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방산시장 부근을 방문하게 된다면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까지 산책하며 청계천 헌책방 골목도 한번 구경해보길 추천한다.
오래된 책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헌책방 거리는 청계천 일대의 헌책방들이 모여 있는 짧은 거리다. 헌책방마다 작은 가게 안팎으로 많은 책들이 쌓여있다. 규모가 큰 가게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책방과 책방 사이에는 다른 가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책방이 모여 있어 지나가는 이들로 하여금 눈길을 사로잡는다.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구경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헌책방의 모습과 거리에 나와 있던 책들이 정겨워 카메라에 담았다.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지 못해 결국 책은 구입하지 않았다. 같이 촬영 나갔던 팀원은 책을 몇 권 샀는데 잘 찾으면 생각보다 좋은 책을 구할 수 있다.
헌책들이 가득 쌓여 있는 골목을 지나다 내가 최고로 애정 하는 만화책을 발견했다. 바로 '슬램덩크'...!
요즘은 애장판이 나와서 오리지널 만화책은 사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사장님이 금액을 싸게 불러서 나도 모르게 넘어갈 뻔했다. 아래 사진을 자세히 보면 중간중간 몇 권이 빠져 있다. 아마 전권이 다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했을 것이다.
헌책방에서 책을 구경하다 보면 꼭 사고 싶은 책을 만나기 마련인데 이 날은 슬램덩크를 제외하고 사고 싶은 책을 만나지 못했다. 대신에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책들을 많이 만났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1960년대에 거리에서 노점식으로 운영되던 헌책방들이 청계천 복개 공사로 인해 갈 곳이 없어지자 평화시장 일대로 모이면서 만들어진 거리입니다.
이 거리에는 과거로부터 쌓여온 추억과 더불어 그 모습까지 남아 있고, 서울시에서도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근현대적 시민 생활 모습을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하였습니다. - 청계천 헌책방거리 홈페이지 소개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청계천 헌책방 거리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시에서는 매년 가을 청계천 헌책방 거리 책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고 하니 올가을에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다시 찾아야겠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이미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거리마다 잔뜩 쌓여있는 책 사진을 찍는 내게 한 책방 사장님이 얼굴은 찍지 말라고 했다. 다른 책방 사장님은 '사진은 왜 찍어 책을 사야지.'라고 말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을수록 장사가 잘되야하는데 헌책방 같은 경우는 식당처럼 반드시 밥을 먹어야 하는 곳이 아니다 보니 사진만 찍고 책을 사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사진을 찍는 나에게 몇몇 책방 주인 분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함께 갔던 팀원은 마음에 드는 책 몇 권을 골랐지만 나는 책을 구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사진만 찍는 사람들이 그리 반갑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 거리가 좋은 이유는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책들이 잔뜩 쌓여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나는 또 이 곳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헌책방 거리는 전시장이 아니라 헌책을 판매하는 가게이니 방문하게 된다면 마음에 드는 책 한 권 발견하는 재미를 잊지 마시길.
당신, 다방에 가본 적 있나요?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편의점도 없는 동네였지만 이상하게 다방은 많았다. 다방은 고스톱 치는 아저씨들이 커피 배달을 주문하거나 아저씨, 할아버지들이 가서 노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런 다방에 대한 내 편견을 을지다방이 단번에 바꿔버렸다. 다방이 이런 곳이라면 언제든 달걀노른자 동동 띄운 달달한 쌍화차를 마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곳이다.
을지로3가역 5번 출구로 나오면 공구 상가들 사이로 '을지다방'이라고 적힌 허름한 간판이 보인다. 최근 재개발 관련 뉴스로 더 유명해진 을지면옥 옆에 을지다방이 위치하고 있다.
색이 바랜 간판 아래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다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문을 열면 '딸랑'하고 울리는 풍경 소리가 들린다. 가게에 들어서면 80년대 배경 영화에 나올 법한 다방의 모습이 손님들을 맞이한다.
함께 촬영 나온 팀원들이 오늘 촬영의 마지막은 반드시 을지다방이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 돌아본 장소와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기어이 을지다방을 찾았다.
쌍화차 3잔을 주문했다. 쌍화차를 주문하면 따뜻한 보리차를 먼저 내어 준다. 보리차를 마시며 가게를 한 번 둘러보고 팀원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쌍화차를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서 사장님의 모습을 유심히 봤다. 사장님은 주전자에 물을 끓였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정겹던지. 어느 순간부터 일상에서 주전자가 사라졌는데 여기서 주전자를 보니 괜히 옛 생각에 빠졌다. 커피 포트도 정수기도 아닌 주전자에 끓이는 물이라니, 쌍화차를 받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맛있을 것만 같다. 달걀노른자 동동 띄운 쌍화차, 어디선가 주워듣기만 했던 그 쌍화차를 이렇게 마시는 날이 올 줄이야!
사장님이 쌍화차는 처음 먹어 보냐 물으며 노른자는 터트리지 말고 숟가락으로 떠서 한입에 쏙~ 먹으라고 알려주었다. 노른자는 조금 이따가 먹자며 아껴두고 쌍화차를 먼저 한 숟가락 떴다.
쌍화차 한 숟가락을 입에 넣는 순간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약국에서 파는 쌍화탕을 상상했던 나는 크나큰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쌍화차는 달달하고 견과류가 씹혀 고소한 맛이 났다. 노른자를 한입에 쏙 넣으니 고소하게 입안에서 탁! 하고 터졌다.
이 집 쌍화차 맛집이네, 맛집이야.
쌍화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게는 어느새 손님들로 가득 찼다. 손님들은 다들 쌍화차를 주문했다. 역시 여기는 쌍화차 맛집이었어...!
가게 분위기가 좋아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가게 벽면 거울에 '사진 촬영을 자제해주세요. 여기는 개인 스튜디오가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사장님이 사진 찍는 건 좋지만 다른 손님들 얼굴은 찍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그 이야기인가?라고 생각했다. 그 안내 문구의 뜻을 가게를 나설 때 알게 됐다.
결제를 하면서 사장님과 잠깐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사장님은 최근 들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좋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장님의 말이 간혹 가다 가게에 와서 옷을 갈아입으며 사진 촬영을 하고 촬영하면서 다른 손님들의 얼굴도 찍는 사람도 있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고 했다. 안내 문구에 개인 스튜디오가 아니라고 적혀 있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나.
요즘 촬영을 나가면 특히나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에서 꼭 한 번씩은 사진을 왜 찍냐고 얼굴 찍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상인분들이 있다. 물론 누군가의 초상권 침해가 될 수 있는 얼굴 촬영은 사전에 협조하지 않으면 찍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는 장소에 가게 되면 카메라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있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예쁜 사진을 찍고 콘텐츠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촬영을 하고 있지만 매번 무엇이 더 나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런 고민들을 뒤로하고 을지다방을 나섰다. 따뜻하고 쌉쌀, 달달한 쌍화차를 마시며 좋은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기에도 좋고 가만히 생각하며 쉬기 좋았던 을지다방.
을지로 촬영의 마지막 장소였던 을지다방을 나서며 오늘 둘러본 을지로가 생각했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공간을 찾고 있는 것일까?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의 것들을 기록하고 남기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둘러본 을지로는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곳곳에 옛날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간판과 거리가 있고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가게들이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핫하다는 말로 다 포장할 수 없는 곳, 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최근 을지로 재개발 관련 이슈들이 계속해서 뉴스에 나왔다. 을지로를 돌아다니며 재개발에 반대한다는 플래카드와 포스터를 보며 그 흔적들을 고스란히 만났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 제대로 된 계획 없이 개발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쌓여 만든 기록은 역사로 남지 않을 것이다.
최근 서울시는 을지로 재개발을 연말까지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너무 낡아서 오래된 가게 건물과 더럽고 정리되지 않은 골목들은 당연히 재정비가 돼야 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더 오래 많은 수 있고 계속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장소가 될 테니 말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다시 한번 을지로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