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대 403호>
6월 초. 기말고사가 거의 끝날 무렵 학교에 강연을 들으러 간 적이 있었다. 연사로 초청받은 분은 유명한 TV프로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는 물리학자로 차분하지만 논리적인 말투와 온화하고 지적인 이미지로 방송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분이었다. 비록 나는 그 TV프로의 열혈 시청자는 아니었지만 유튜브에 올라오는 짧은 클립들은 종종 챙겨 보는 편이라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강연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날 강연에서 교수님이 보여준 슬라이드에는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그림에는 아홉 개의 점이 찍혀있었고 오로지 ‘네 개의 직선만을 이용해 점을 전부 연결하시오’ 라는 문구가 옆에 적혀있었다. 그 문제는 영재 테스트에서 사용되는 문제로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하지만 답을 몰랐던 나는 서둘러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점을 아홉 개 찍고 선을 이리저리 그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선을 그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조금 늦은 나이였지만 나는 내가 영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간 조금 지나자 교수님은 슬라이드를 한 장 더 넘겨 답을 공개했다. 다음 슬라이드에는 아홉 개의 점을 모두 이은 네 개의 직선이 있었다. 다만 내가 노트에 그려둔 그림과는 다르게 슬라이드에 나온 직선 중 세 개는 커다란 삼각형을 이루며 점 밖으로 살짝 튀어나와있었다. 나처럼 답을 몰랐던 사람들은 ‘왜 나는 저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라며 머리를 긁적였고 답을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자신들도 한때 그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중요한 게 그게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살짝 저으시고는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잠시 여러분들이 방탈출 카페에 왔다고 생각해 봐요. 방문은 잠겨있고 이 방을 나가기 위해서는 여기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열쇠를 찾아야 해요. 하지만 아무리 방을 뒤져도 열쇠는 보이지 않아요. 그럼 여기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다시 방을 뒤지기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는 더 세밀하게 뒤져보겠죠. 그래도 열쇠는 나오지 않아요. 여기서 조금 더 세밀한 사람은 공책을 꺼내들고 방을 아홉 구역으로 나누고 다시 한 곳씩 차례대로 뒤져요. 마지막 구역까지 뒤졌지만 열쇠는 여전히 나오지 않죠. 그럼 이제 우리는 열쇠는 방 안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죠.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열쇠의 위치가 아니에요. 그건 바로 여러분들이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도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갈 용기를 가지게 됐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용기는 여러분이 방을 전부 확인해 봤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거죠.
이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처음부터 답을 아는 사람은 없어요. 그 사람은 답을 찾은 게 아니라 답을 외우고 있던 거죠. 여러분들이 무슨 일을 할 때 어중간하게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지금 자신이 나아가고 있는 길인지 모르겠다면 그곳에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봐야 해요. 그리고 끝에 도착했을 때 답이 없다면 미련 없이 문을 부수고 나오세요. 이제 여러분은 답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까요.”
강연이 끝난 직후 하늘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추적이는 캠퍼스를 어슷하면서 나는 프랑스어를 처음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건 내가 가장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것 중에 하나였고 동시에 나한테 가장 많은 물음을 건넨 삶의 조각이었다. 대학교 전공을 프랑스어로 고른 이유도 고등학교 때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게 후회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선택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나는 여전히 프랑스어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과연 이 언어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적어도 내 주변에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군대를 전역하고 혼자 파리로 향했다.
파리는 정말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파리 빵집에서 먹은 밀푀유는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먹어본 디저트 중에 단연 최고였고 밤에 숙소 사람들과 보러 간 화이트 에펠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났다. 그리고 생트 샤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봤을 때는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과 즐거움을 속에서도 나는 파리와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 답은 이곳에 없었고 나는 결국 그해가 지날 무렵 전과를 했다. 하지만 프랑스어와는 다르게 글쓰기를 하면서 의문점을 가져본 경험은 거의 없다. 둘다 정말 오랫동안 해온 일들이고 내세울 만한 결과물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나는 미련 없이 포기했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손에 쥐고 있다. 어째서였을까?
나는 애정의 차이라고 본다. 모든 일에는 반복적인 노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싶다는 거나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는 등 꿈의 크기에 상관없이 노가다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설령 그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평범한 일과 좋아하는 일에 차이점이 있다면 좋아하는 일은 노가다를 버틸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는 사람은 그 과정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나한테 있어서 글쓰기는 그런 거였다. 늦은 새벽까지 자판을 두들기면서 이 원고를 마무리 짓고 있다는 게 이 말의 증거인 셈이다. 물론 늘 좋은 날만 있던 건 아니다. 요즘 들어 내가 서있는 자리에 대해서 고민도 해보고 가끔씩은 길을 잃었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문을 부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프랑스어와는 다르게 나는 아직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은 괜찮다. 아직 열쇠는 이 방 어디에 있는 것 같다. 조금 더 찾아봐야겠다. 다만 이번에는 좀 더 세밀하고 꼼꼼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