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에 대한 중용
인간은 이분법을 좋아한다. 처음 보는 버섯을 보고 늘 '조금만 먹어볼까?' 하던 조상님들은 모두 독버섯을 먹고 죽었다. 뿐만 아니라 세력 다툼에서 애매한 스탠스를 취했다가는 양쪽에서 뺨을 맞고 아무것도 건질 수 없는게 인간 사회다. 아무도 그런 사람을 자기 편으로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들의 후손인 우리들은 이분법을 좋아한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사회는 더 안전해졌고, 개개인은 집단을 이루지 않고도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분법적 사고는 오히려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부추기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중용을 이야기 한다. 나는 철학에서 다루는 심오한 개념으로서의 중용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모자라거나 지나침 없는 적당함'을 지칭하고자 한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늘 마음에 담고 있는 균형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사진을 찍기 위해 셔터를 누르면, 카메라는 셔터 등을 조절해 '적당한 빛'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적당한 빛의 기준은, 흰색의 물체가 18%의 빛을 반사했을 때의 밝기다. 이 밝기가 인간의 눈이 느끼는 딱 중간 밝기의 회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메라는 보통 사진 전체를 흑백으로 보았을 때 평균 18% 반사율이 되도록 세팅되어 있다. 역광에서 사진을 찍으면 사람 얼굴이 까만 것도 이런 이유다.
사진의 픽셀 한 점 한 점을 우리 인생의 사건이라고 비유해보자. 만약 당신이 인생의 모든 결정에 중용을 철저하게 지켜서, 인생이라는 사진의 모든 점이 같은 밝기의 회색이 됐다고 치자. 이론적으로는 더 없이 완벽하게 밝기를 맞춘 사진일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회색으로만 가득찬 사진을 감상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사진의 본질은 '빛의 차이'가 전달하는 정보다. 하나의 색은 다른 색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가진다. 어떤 부분은 배경이 되어야만 다른 부분이 피사체가 될 수 있다. 그 차이가 절묘할 때 우리는 그 사진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모자라거나 넘치는게 무서워 한 발 씩 물러나다 보면,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다 보면, 중용이랍시고 죽도 밥도 아닌 결정을 하다보면, 우리 인생은 아무런 정보도 재미도 없는 회색빛 사진이 될지도 모른다.
상처받기 두렵다고 사랑을 망설이지 말자. 때로는 잠시 무언가에 미쳐도 보자.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피드백은 넣어두고 열렬히 축하만 해주자. 울고싶을 때는 펑펑 울자. 고객에게 다 퍼줘도 보자. 부당하다 싶을 땐 들이박아보자. 사람이 아니다 싶으면 단호하게 손절하자. 비싼 물건도 한 번씩 질러보자. 협상할 때 과감히 불러도 보자. 일이 아무리 잘못돼도, 나의 삶이 더 다채로워졌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집에 강도가 들었다면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려야 하는 것처럼, 중용도 적당해야 한다. 이것이 중용에 대한 중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