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눈에 캔디>
우리 가족은 외출을 마치고 집에 들어올 때면,
현관문을 열며 가장 먼저 집 안에 있는 누군가를 부른다.
“@@야, 할머니 왔다!”
“할아버지 왔다!”
“엄마 왔다!”
그리고 혹시 아이가 거실에 나와 있지 않으면,
곧바로 묻는다.
“애기는?”
키 150cm에 몸무게 45kg이 넘는 아이를 아직도
애기’라 부르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그 말이 틀렸다고 해도, 도무지 듣지 않으신다.
(위 사진은 10년 전 사진.. 낚이셨으면 죄송합니다)
문득 예전에 본 인터넷 사연이 떠오른다.
여든이 넘은 부모님이 중년 아들의 차를 타고
병원에 가시면서, 친구분과 통화 중
이렇게 말하셨다고 한다.
“어~ 나 우리 아기 차 타고 병원 가는 중이야.”
그 이야기를 들은 쉰다섯 살 아들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고.
그 장면과 함께, 자식 사랑,
그중에서도 큰아들 사랑이
유독 각별하셨던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참 성격이 뚜렷하신 분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라 다행이다 정말 ㅎㅎ)
팔은 아무리 안으로만 굽는다지만
내 자식의 흉은 열 개여도 조금도 흠이 아니고,
남의 자식은 흉 하나만 있어도
내 자식 흠에 비할바가 아닌 분이셨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할아버지가 권력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음)
“늙으면 죽어야지, 죽어야지.”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면서도
아침이면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들여다보며,
“아침에 발이 부으면 저승사자가 데리러 온다더라.
내 발이 부었나?”
하시며 걱정이 터지던 할아버지
그럴 때면 좀 귀여워 보이시기도 했다.
큰아들이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아들이 귀찮아할까 봐 직접 전화는 하지 않으시면서도
며느리와 손녀들을 붙잡고
서너 통씩 전화를 하게 하셨는데
자기 손으로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걱정을 안 하실 수는 없었던 거다.
연세가 아흔 가까이 되도록 예순 넘은 아들 손에
무거운 짐이 들려 있는 걸
그냥 보고 넘기질 못하셨던 할아버지.
예전 가난했던 시절에 큰아들이 첫 딸을 낳았다고
쌀 한 가마를 이고 강원도 산골에서
제일 배운 사람에게 가서 손녀의 이름을 지어오신
낭만 있는 할아버지.
(그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하필
북에서 내려온 분이었는지라,
훗날 그것도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지만.
어쨌든 손주들 중 나만 돈을 들여 이름을 지었다고,
다들 부러워하곤 했다.
첫째는 그렇게, 늘 더 많은 애정을 받는 법이다.)
이런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예전 어른들이 왜 ‘내리사랑’이라는 표현을 썼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
할아버지가 아빠와 우리를 그렇게 아끼셨듯,
아빠는 또 나와 내 아이를 그렇게 사랑해 주신다.
이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마치 시냇물이 강물이 되고, 강물이 바다가 되듯
흘러가며 더 커지는 물줄기처럼 이어진다.
그래서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한 번은 엄마들끼리 모여 커피를 마시며,
“도대체 아이는 언제까지 귀여운 걸까?”를 주제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중학생 첫째와 초등학생 둘째를 둔 한 엄마가 명쾌한 기준을 제시했다.
“아이 발바닥에 뽀뽀할 수 있어? 그럼 아직 귀여운 거야.
나는 첫째 발바닥엔 이제 못하겠더라고. 둘째는 가능해.”
‘발바닥 뽀뽀’라니. 정말 신박한 기준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 벌써 3년쯤 됐지만,
나는 여전히 내 아이의 발바닥에 뽀뽀를 한다.
아마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문득, 정말 문득 궁금해진다.
큰아들 사랑이 유별나셨던 우리 할아버지는
과연 우리 아빠의 발바닥에 뽀뽀를 언제까지 하셨을까—
그런, 별것 아닌 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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