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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나 작가 May 18. 2023

아홉 살에겐 비겁한 내복

격동의 아홉 살 인생

그건 애기가 입는 비겁한 내복이에요...



아침부터 내복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던 나는 아들의 항변에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아들은 올해로 아홉 살(만 7세)이 되었다.

2학년이 되더니 몸도 생각도 두뼘 정도 자란 모양새다.


며칠 전, 아이 충치가 열두 개이고 심각하다며 대대적인 수술을 강력히 진단받았다.

그중 왼편에 있는 위쪽 충치를 다 치료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음도 지갑도 울고 있는 날 향해 썩은 이에 씌운 크라운(철재 비스무리한 걸로 된 치아 덮개)을 드러내며 아이가 툭 한 마디 던졌다.



"엄마! 나 이거... 친구들한테 자랑해도 돼요?
내 이가 반짝여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날 바라보는 아들은 들떠 있었다.

할 말을 잃었다.

망연해진 나는 부지불식 중에 짜증이 훅 올라왔다.


"쏭, 지금 양치를 제대로 안 해서 이가 다 썩어서 치료한 거야. 근데 그게 자랑할 만한 걸까?"


아이가 자랑하고 싶다는 '반짝이는 크라운'만큼 반짝이는 아이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었다.

말하고도 순간 아차 싶었다.

아이가 힘들게 치료받는 걸 보는 동안 내 마음도 힘들었나 보다.

아이는 나와 남편이 같은 으로 답하자 눈도 입도 삐죽거렸다.

이내 눈물을 글썽거리던 아들이 엄마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게 꼭 그렇게 잘못된 건가요?"


잘못.

뭐 잘못은 아니지 싶었다. (잘못이라면 엄마인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게 잘못이겠지)

아이의 그렁그렁한 눈을 보니 또 내가 작아진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어린아이가 무슨 잘못이야.' 남편과 서로 이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곧 씩 하고 웃는다.


아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내 새끼가 틀림없어!'라는 확신이 든다.

어미를 닮아 감수성이 날로 풍성해지는 아들.

아들이 훌쩍 자라고 있음을, 변하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된 사건이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지난 오늘 아침, 이번에는 아들이 내복을 가지고 투덜댔다.


"쏭, 겨울 내복 너무 덥겠다. 날이 더워졌으니 다 벗고 이걸로 입고 가볍게 윗옷을 입자."


내가 한 말에 아들은 '비겁한 내복이라 친구들이 보게 되면 부끄럽다'라는 심오한 의사내비쳤다.

이 한 마디로 수치심, 타인에 대한 시선 의식,선명한 자기 의사, 점점 중요해지는 친구 관계 등 여러 면이 엿보였다.



한데 '비겁한 내복'이라...

아이의 조그만 입에서 흘러나온 그 단어가 물음표와 함께 아침 내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비겁한 내복, 비겁한 내복...


'도대체 비겁한 내복이란 어떤 내복일까?'



무적의 수퍼 히어로 배트맨이 새겨졌으나, 아홉 살 아들에게는 그 배트맨조차도 비겁하게 느껴지나 보다.

작년까지만 해도 '배트맨'이 있다며 마치 이 내복을 입은 자신이 영웅이라도 된냥 가슴을 활짝 펴며 웃던 아이가, 이 내복이 좋다며 줄기차게 입어대던 그 아이가 일 년 만에 확연히 달라졌다.

아들의 머릿속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요즘은 참 아이들의 심리 변화와 성숙이 한시바삐 서둘러 다가오는 것 같다.


여전히 '비겁한 내복'이 무엇인지 알 길은 없으나, 한 가지는 확실히 깨우쳤다.

감수성이 예민한 우리 아들은 사춘기가 빨리 올 거 같다.

마음을 단단히 준비하고 아들과 적당한 거리를 서서히 두어야겠다.


과연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커가는 아이의 생각에 대해 명쾌한 답이 존재할까.

취향 존중, 의사 존중

이런 단어들로 미궁에 빠진 '비겁한 내복'에 대해 정의 내리며 이 의문을 마무리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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