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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Feb 08. 2019

패션 디자인의 완벽히 새로운 접근법

똑똑한 디자이너 그레이스 웨일즈 보너 이야기

책 속의 세계에 갇혀 현실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답답하다. 반대로 책과 담쌓은 티를 팍팍 내며 자신의 Street Knowledge만을 믿고 정리되지 않은 논리로 의욕만 앞서 달려드는 사람은 답답한 데다가 피곤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책으로부터 얻은 지혜를 자신의 커리어에 적정한 수준에서 훌륭하게 활용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고 그런 사람을 보면 나는 첫째, 부럽고, 둘째, 궁금하고, 셋째, 무엇이든 잔뜩 배우고 싶다.


1980년대 후반에 발표한 탈식민주의적 정체성 담론의 하나인 크레올리테 찬양Eloge de la Créolité의 크레올리테Créolité라는 텍스트를 자신의 컬렉션 옷에 새겨 넣고, 패션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기의 독서 목록을 남기며, 탈식민지 이론에 깊은 관심을 가진 '진짜' 박식한 여성 디자이너가 있다. 그녀는 칼 라거펠트와 마크 제이콥스, 피비 필로가 심사한 2016 LVMH Prize for Young Fashion Designers를 수상하고 런던의 고오급 편집 매장 도버 스트릿 마켓과 셀프릿지 백화점에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입점시켰으며, 지독한 책벌레이면서 동시에 사진, 음악, 조각 등에도 조예가 깊다. 또한 사람들과의 소통에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의 혼혈로 태어나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으로 탄탄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영국의 여성 패션 디자이너 그레이스 웨일즈 보너(28)의 이야기다.



1950년대 자메이카에서 영국으로 넘어온 흑인 아버지와 잉글랜드 출신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웨일즈 보너는 충동적으로 지원해 합격한(이런 형용은 필수적이다) 영국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에서 의상 디자인에 대한 소질을 발견한다. 자신을 Art Show를 하는 무모한 패션 디자이너로 소개하는 그녀는 2015년 British Fashion award와 L’Oréal Professionnel Talent award를 수상하며 패션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직업은 분명 패션 디자이너이지만, 그녀의 활동 영역은 의상 디자이너에 국한되지 않는다. 비디오, 사진, 음악, 책, 조각, 라이브 공연 등을 포괄하는 그녀의 아트 쇼에는 그녀의 작품보다 그녀가 존경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일종의 오마주의 개념도 섞여 들어간다.)


중학교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버스 이동으로 보냈다는 그녀는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영국 내 이슬람 사원 그리고 다양한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을 관찰하며 스타일에 대한 나름의 아이디어와 감각을 키워냈다. 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메이칸 친척들과 어울리고 무엇이든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의 서재에 가득한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을 탐독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웨일즈 보너는 어린 시절 자신을 흑인이라고 부르는 백인들과 자신을 백인이라고 부르는 흑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다.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웨일즈 보너는 그렇게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계기로 역사와 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지식은 단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시간을 쏟으며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이자 포스트 영국 식민주의가 최대 관심사인 패션 디자이너라니 흥미롭다.)


웨일즈 보너는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의 Court Dress로부터 영감을 받아 컬렉션을 구성하고, 미국 흑인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다룬 소설 이스마엘 리드의 1972년작 'Mumbo Jumbo'로부터 이름을 빌려 와 컬렉션의 타이틀을 규정하기도 하며, 나이지리아 태생 작가 벤 오크리와 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녀는 예술을 통해, 특히 패션을 매개로 흑인 문화의 미학적 면모를 드러내고자 노력하는 것인데, 그녀는 자신의 역사관과 분석적인 사고가 표출되는 하나의 창구로 ‘패션'을 이해하고 있다. 즉, 패션을 좁은 의미의 패션으로 국한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패션을 그녀의 생각을 표현하는 여러 수단 중 하나로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그녀가 패션을 작게 또는 소홀하게 생각한다는 걸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녀는 맥락을 넓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여성복이 아닌 남성복으로 패션 디자인 커리어를 시작하고, 백인보다는 흑인 모델에 집중해 컬렉션을 진행해 온 웨일즈 보너는 성의 경계, 통념의 경계를 넘은 디자인을 표현하면서 유연한 사고의 확장을 경험해 왔다. 특히, 그녀의 컬렉션 무대에 서는 흑인 남성 모델은 카니예 웨스트나 우사인 볼트와 같은 블랙 알파 맨의 모습이 아닌 특유의 가냘픈 느낌을 보여주는데, 약 100년 전 흑인 남성들의 부드럽고도 아름다웠던 왕자 같은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녀의 컬렉션과 아트 쇼를 보면 '확장의 소통' 내지는 '체험의 확장'이라는 워딩을 떠오르게 한다. 문학, 역사, 예술, 학설 등을 넘나드는 다종다양한 레퍼런스와 미술, 사진, 조각을 포함한 예술적 요소와 패션과의 화합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다운 사고의 중심에 놓인 독서의 힘은 풍부하고도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새로운 디자인의 정의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듯하다.


그레이스 웨일즈 보너의 컬렉션과 디자인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는 일은 어쩌면 장르를 막론하고 도처에서 튀어나오는 ‘융합’이니 ‘통섭적 사고’니 하는 추상적이고 가끔 하나 마나 한 말처럼 여겨지는 개념들을 이해하는 꽤 괜찮은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진짜 쓸데없는 이야기 하나,

가수 크러쉬는 2017년 4월에 래퍼 빈지노의 웨일즈 보너 트랙 팬츠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참고:

1)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19/feb/02/grace-wales-bonner-im-a-fashion-designer-making-art-it-could-be-seen-as-silly


2) https://www.theguardian.com/fashion/2017/jun/13/menswear-grace-wales-bonner-designer-black-male-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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