뎀나 바잘리아에게 한 수 가르쳐 준 패션 디자이너 '마틴 로즈'
유순한 광인이 미래를 앞서 나간다는 말이 있다. 오늘 소개할 영국의 여성 패션 디자이너 '마틴 로즈'가 제시해 온 패션 비전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문장이 또 있을까. 말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돼 부정하고만 싶던 그녀의 기묘한 남성복 스타일이 100년 된 패션 하우스에 옮겨붙는 기적 같은 일.
또 인생이란 결국 어느 순간에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의 의미를 단박에 이해하기에 그녀의 인생만큼 좋은 사례가 또 있을까. 삼십 대 중반까지 생활고에 시달리며 자신감을 잃고 뒤처졌던 그녀의 일상과 달리 늘 몇 십 보씩 앞서만 갔던 그녀의 패션 크리에이티브를 알아봐 준 현시대의 가장 영특한 패션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와의 예술 같은 만남 말이다.
영국 런던의 캠버웰 예술 대학을 졸업하고, 미들섹스 대학교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한 '마틴 로즈'는 2002년 예술 대학 동료 '타마라 로스터인(현재까지도 마틴 로즈의 스타일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과 함께 티셔츠 라인 'LMNOP'를 열지만 2005년 접는다.
이후 2007년, 셔츠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동명의 패션 브랜드 'MARTINE ROSE'를 설립해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운영 중이다.
자메이칸과 영국인의 피가 반반씩 섞인 마틴 로즈, 대가족 문화 속에서 성장한 그녀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언니, 오빠, 삼촌이 소위 '레이브 Rave'라고 부르는 댄스파티(음악과 술, 마약이 함께했고 대개 불법적이며 흔히 퇴폐적이었다)에 클러빙을 나가기 위해 한껏 치장하던 모습을 지켜보며 '패션' 세계에 눈을 뜬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캐서린 햄닛, 장 폴 고티에, 팸 호그 그리고 보이 런던과 바디 맵, 크리스토퍼 네메스까지. 그들이 입고 쓰고 걸친 모든 패션 아이템은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쿨하고 멋진 것의 정점이었고, 십 대 초반부터 그들을 몰래 따라가 즐기던 비공식적 파티의 음악과 댄스는 그녀의 몸과 마음에 이식돼 문화적인 욕구에 불을 댕겼다.
그곳에서 만난 남녀노소, 백인, 흑인, 게이, 레즈비언 그리고 자기만의 음악 취향을 간직하고 멋진 패션 스타일을 뽐내던 사람들과의 만남은 훗날 패션 브랜드 'MARTINE ROSE'의 핵심 정체성과도 같은 서브컬처 에스테틱과 다양성 존중, 패션 관습으로부터의 탈피(춤추기에 좋고 편한 풋볼 트레이닝 바지와 화려한 상의의 매칭처럼) 등을 빚어낸 귀중한 체험 자산이 된다.
앉아서 보그를 읽거나
캣워크 쇼나 보면서
패션에 입문한 게 아니에요.
클럽으로 향하는 언니들이
옷 입는 걸 지켜보거나
할아버지가 교회에 어떻게 입고 가는지
구경하면서 시작됐죠.
스퀘어 토가 인상적인 로퍼 뮬, 주체할 수없이 펄럭이는 거대한 와이드 팬츠, 셔츠를 잔뜩 욱여넣은 하이 웨스티드 팬츠, 뒤틀리고 주름진 풋볼 저지, 무자비하게 크랍된 청재킷과 울트라 와이드 숄더 봄버 재킷, 단춧구멍을 잘못 찾은 대책 없는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왜곡된 테일러드 블레이저 등 마틴 로즈 패션 스타일의 정수는 익숙하고 당연한 기존의 패션 문법을 작살내는 대담하고 창의적인 실루엣과 아슬아슬한 불균형의 멋이다.
그녀는 옷의 볼륨과 비율, 패브릭의 긴장감 등 패션의 구조적인 감각에 집중하는 편이기에 일상적인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스타일을 이끌어낼 줄 안다.
2013년, 그야말로 아방가르드한 패션쇼를 선보인 마틴 로즈는 한 인터뷰를 통해 길바닥 청소에 아주 제격으로 보이는 브랜드의 시그니처 '슈퍼 와이드' 팬츠의 실루엣에 스스로 감탄하며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스타일이 다시 '통'하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고 말했는데, 확실히 그녀는 시간을 앞서 살며 새 시대의 혁신적이고 흥미로운 남성 패션 미학을 정립하는데 어떤 천부적이고 흔치 않은 감각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울트라 파워 숄더 재킷이나 사이클링 쇼츠를 힙한 패션 아이템으로 승화시킨 것 또한 분명 그녀의 업적일 것이다.
관련하여 마틴 로즈 디자인 스튜디오에서는 '유머(재밌는가)'와 '섹스(섹시한가)' 그리고 '플레이(이상한가) 라는 세 가지 키워드만이 돌고 돌 뿐이며 그것들이 패션 의사 결정에 영향을 주는 유일한 요소라고 하는데, 역시나 진지하고 심각한 태도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인생은 언제나 그리고 무조건 즐겁고 재밌어야 한다! 제발!
34살까지 술집에서 일하며 힘겹고 벅찬 일상을 살아가던 마틴 로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것은 패션계에서 가장 힙한 디자이너이자 'MARTINE ROSE'의 오랜 팬이었던 '뎀나 바잘리아'의 발렌시아가 맨즈웨어 컨설팅 제안이었다.
단 한 번도 패션 잡을 가져보지 않고 자기만의 크리에이티브에 골몰했던 언더그라운드 언더독이 단번에 프랑스의 정통 쿠튀르 하우스 '발렌시아가'에 입성하는 예술 같은 일, 마틴 로즈는 그렇게 2016년부터 약 3년간 뎀나 바잘리아의 곁에서 남성복 컨설팅을 진행하며 그곳에 'MARTINE ROSE'의 감성을 이식한다(마틴 로즈 컨설팅 시절의 발렌시아가 컬렉션과 마틴 로즈의 지난 컬렉션을 병치해보라) 그리고 이를 통해 개인적인 자신감을 회복하고 경제적인 여유도 갖게 된다. 어휴, 축하합니다!
발렌시아가는
저를 완전히 변화시켰어요.
엄청난 자신감을 주었죠.
거긴 닿을 수 없는 곳이라 생각했고
지원해 볼 배짱도 없었으니까요.
자메이칸 대가족과 함께 성장하고 멜팅 팟 런던의 클럽 문화를 즐기며 다양한 사람들과 부대끼던 경험 탓인지 '마틴 로즈'의 브랜드 운영의 중심에는 '커뮤니티'의 정신 또한 놓여있다. 그래서 컬렉션 장소가 꽤나 특별하다. 영국 토트넘의 시장, 캠던의 주택가, 그녀의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 실내 인공 암벽 등반 무대 앞에서 실제 주민들이 초대되어 패션쇼가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종잡을 수 없기에, 관습을 따르지 않기에, 남성복은 모름지기,라는 어설픈 기대나마 여지없이 박살 내는 단호함 때문에 패션 브랜드 'MARTINE ROSE'가 진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경계를 무너뜨리는 혁신가이자 파괴적인 상상가인 디자이너 '마틴 로즈'의 의도적으로 이상했던(?) 지난 컬렉션은 초반에 늘 외면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없는 살림 속에서도 계속 자기만의 전위적인 크리에이티브를 실험했고 끝내 전 세계의 남성복 패션 트렌드를 이끄는 선봉이 되었다.
그녀의 오리지낼러티와 실험적인 태도 그리고 새로운 남성성의 탐구가 어디까지 뻗어갈지 너무나 궁금해진다.
나는 단 한 번도
커머셜한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
언젠가 그렇게 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상업성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라.
당신이 하는 일에 집중하면
곧 그렇게 될 거니까.
All Photos: Martine rose Offi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