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ily Oberg의 Sporty and Rich 스포티 앤 리치
역설의 시대엔 역시 반대로 가야 한다. 트렌드도 정도껏이지 자꾸 밀고 들어오면 소화가 안 된다. 새로운 감각과 느낌만 자꾸 찾는 건 철학의 빈곤을 드러낼 뿐이다. 새로운 것이 솟아날 구멍이 모두 막혀버렸을 때에는 버젓한 과거에 기대게 된다. 과거는 대체로 안정적이고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세례를 받으며 검증된 스토리와 이미지의 힘은 그래서 강력하다.
패션 브랜드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패션 브랜드들은 과거의 것들에 점을 찍고 ‘이거 봐, 우리는 이런 광고를, 이미지를, 패션을, 스타일을 괜찮게 여길 줄 아는 놈들이라고!”라고 주장함으로써 현재의 좌표를 드러내는데 열심이다.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는 브랜딩 과정의 곳곳에 옛것들을 때려 박기로 유명하다. 90년대 미국 힙합 씬, 스케이트보드 컬처의 아이코닉한 레퍼런스를 과감하게 차용하고, 앞으로의 패션 트렌드를 내다보면서 이제는 ‘중고(second-hand)’가 대세가 될 거라고 주장할 정도다.
2020-21 F/W 런웨이의 현장에서도 과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구찌, 드리스 반 노튼, 에르메스는 70년대의 락 스피릿, 보헤미안 스타일이 물씬 풍기는 룩으로 시간을 뒤집었다. 인생도, 유행도, 패션도 돌고 돈다. 이제 과거의 재현은 철 지난 촌스러움이 아니라 도리어 신선함을 담보하는 매력 코드다.
오늘 스누피가, 아니, 스눕피가 소개하고 싶은 뉴욕 기반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스포티 앤 리치(이하 S&R)’ 또한 과거의 멋과 맛을 추종하며 고유의 매력적인 이야기를 쌓아올렸다. 그것도 매우 성공적으로! 한국에는 스웨트셔츠와 팬츠 그리고 볼캡으로 이미 널리 알려졌다.
본래 ‘S&R’은 80, 90년대의 광고/매거진 이미지, 빈티지 라이프스타일/럭셔리 굿즈, 미국의 포토그래퍼 ‘슬림 애론즈’ 풍의 사진 등을 아카이빙하던 창업자 ‘에밀리 오베르그’ 개인의 인스타그램 ‘비주얼 무드 보드’였다. 이것이 이후 프린트 매거진의 형태로 변화하고, 이어서 패션 브랜드로 발전하다가 종국에는 총체적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하지만 ‘과거’라는 키워드는 ‘S&R’의 오직 반쪽만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이다. 할 말이 꽤 많은 브랜드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든은
과거로부터 영감받은 거예요.
70, 80, 90년대의 재해석인 셈이죠.
그것들이 더 개성이 있고 깊이가 있어서요.
브랜드 ‘S&R’와 창업자 ‘에밀리 오베르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매력 키워드는 요즘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가치들로 가득하다. 일종의 ‘사기캐’랄까.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N잡러, 인플루언서, 건강, 퍼스널 브랜딩, 미니멀리즘, 레트로까지. 어떤가? 관심이 좀 생기지 않나? 무엇보다 요즘 시대의 매력적인 여성 취향이 궁금한 당신이라면 정말 잘 찾아오셨다.
‘S&R’의 창업자 에밀리 오베르그는 캐나다의 시골 마을 캘거리 출신인데, ‘클럽 모나코’의 바이어로 일하던 그녀의 고모 덕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패션’에 눈을 뜨게 되었단다. 이후 그녀는 성인이 되어 힙한 대도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미국의 유명 매거진 COMPLEX에서 비디오 에디터로 일하던 중 눈에 띄는 취향으로 빚어진 개인의 명성 덕에 어린 나이에 뉴욕을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 ‘KITH’의 여성 라인 크리에이티브 수장까지 맡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력도 그녀의 오직 반쪽만을 설명해 준다. 그녀는 세계적인 ‘인플루언서’이자 ‘라이프스타일’ 구루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S&R’는 사실 그녀가 COMPLEX 매거진의 에디터로 일하던 2015년에 취미 겸 사이드 잡으로 시작한 그녀의 개인 프로젝트였다. 기본 2개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여러 가지 사이드 프로젝트를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동시대 뉴요커들로부터 받은 자극에 의해 탄생하게 됐다고 하는데, 이러한 시작점은 꾸준한 딴짓으로 기회를 만드는 요즘 시대와 세대에 걸맞은 매력적인 스토리다.
2016년 5월, 에밀리 오베르그는 ‘S&R’ 페이퍼 매거진 창간호를 출간한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전환되던 시기에 개인 시간을 쪼개 만든 일종의 커피 테이블 북이었다. 매거진은 오리지널 이미지 콘텐츠로 예쁘게 채웠다. 사람들의 공간 속에 침투해 그들이 직접 보고 만지며 느낄 수 있는 실제적인 브랜딩을 하길 원했다고. 그리고 보다 앞서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그녀만의 취향과 심미안으로 건져올린 기분 좋은 과거 이미지들을 쌓아올렸다. 올드카 커머셜, 올드 무비 포스터, 70년대의 정경을 담은 사진, 90년대 모델 이미지는 시대를 잘못 만나 더 아름다웠다.
모두가 한 방향(디지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곳에서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느니 다른 길(아날로그)을 새롭게 닦아놓고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는 ‘에밀리 오베르그’. 브랜딩이 결국 깃발 꽂기 게임이라면 그녀는 철 지난 곳, 사람들이 다 떠난 곳에 ‘S&R’의 깃발을 꽂고 과거 여행 가이드를 자처했다. 그렇게 그녀는 트렌드에 흔들리지 않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었다.
‘S&R’라는 브랜드명은 나쁜 것을 절제하고 건강히 잘 먹으며 열심히 운동하는 삶을 지향하고, 풍성한 행복과 삶의 질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에밀리 오베르그’ 개인의 비전을 담아낸 것이다. 그래서 브랜드의 운영 방침도 깔끔하다. 젊은 세대가 건강과 운동에 더 관심을 갖게 하는 것. 이것은 ‘S&R’이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태도를 기반으로 한 스트리트 웨어 스타일에 집중하는 이유이자 ’S&R’의 티셔츠와 모자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직설적이고 명쾌한 텍스트가 조금도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Health is Wealth
Be Nice. Get Lots of Sleep
Drink Plenty of Water
패션 브랜드가 나아갈 길은 역시 선한 영향력이 아닐까? ‘S&R’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질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한 브랜드의 구체적 노력 또한 확인해볼 수 있다. 더욱이 브랜드의 모든 제품은 공정 무역과 환경친화적 생산을 지향한단다.
‘S&R’는 국내에서도 이제 나름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길거리에서도 자주 눈에 걸리기 시작했으니까. 특히 유행에 민감한 여성이라면 더욱 모를 수가 없겠다. 그런데 갑자기 왜?
미국 패션지 ELLE의 한 에디터는 ‘fancy on top, sweats on bottom’이라는 표현으로 비대면 재택근무 시대의 스타일, zoom 시대의 패션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설명했다. 드레스 ‘업’이 도리어 ‘쿨’ 다운으로 느껴지기 쉬운 요즘 시대에 90년대 스포츠 웨어의 감성을 재현하는 ‘S&R’의 담백하고 절제된 스웨트셔츠와 스웨트 팬츠의 인기는 어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창업자 ‘에밀리 오베르그’는 코로나19 이후 캐주얼 라운지웨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스포티 앤 리치’의 매출이 크게 증가했다고 밝혔다.
구글 이미지 검색창에 ‘S&R’를 검색해보자. 얼핏 보면 단순하고 지루한 디자인으로 가득한 제품 라인업에 당황할지도 모르겠고, 내가 찾던 깔끔하고 무심한 디자인이 이런 거였다며 시급히 결제를 시도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상반된 반응을 부르는 지점 위에 브랜드의 아이덴티티가 놓여있다. 바로 미니멀리즘이다.
저의 인생 철학은 less but better입니다.
단순하지만 질 좋고 입기 편한 옷을 만들겠다는 창업자의 의지, 무심한 듯 귀엽고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는 깔끔한 디자인을 향한 열정, 입지도 않을 옷을 구매해 매해 쌓아두는 것보다는 한번 사두면 오래 입을 수 있는 ‘데일리 유니폼’을 만들고 싶다는 철학까지. ‘S&R’의 모든 상품은 창업자 ‘에밀리 오베르그’ 개인의 확장인 셈이다.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는 무언가를 덜어내는 행위는 결국 소비 방식과 삶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불러온다고 말했는데, ‘S&R’의 미니멀리즘 브랜딩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릇이든 옷이든 양말이든 책이든
주 단위로 안 쓰는 물건을 정리하세요.
덜 가지고 살게 되면
마인드도 함께 정리되거든요.
당신만의 라이브러리를 만드세요.
적은 리소스와 도구만으로도
할 수 있는 건 많습니다.
집에서 비트를 만들든
웹사이트를 만들든
일회용 카메라로 사진을 찍든요.
대신 최종 목표는 알고 가야죠.
나쁜 이유로는 말고요.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오바라 가즈히로’는 앞으로의 시대를 내다보며 비효율적인 개개인의 기호가 새로운 자본이 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와 관련한 정보가 가치가 되는 시대 말이다. 좋아하는 것에 매진하는 개인의 열정 그리고 그걸 공감하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패션 브랜드라고 예외일 순 없을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차근차근 고유의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일, 자기만의 패션 취향을 드러내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뭉치는 과정이 곧 하나의 브랜딩이 되는 것이다.
스트리트 브랜드 ‘슈프림’의 스웨트 셔츠를 좋아하는 ‘에밀리 오베르그’는 그것을 생산하는 같은 공장에서 'S&R'의 스웨트 셔츠를 생산해 판매한다. 'S&R' 제품의 한정 수량 발매 전략은 다름이 아니라 그녀의 스케줄이 그 이상의 제품 생산과 판매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평소 이베이 검색을 통해 80, 90년대 빈티지 티셔츠를 검색해 과거의 매력적인 그래픽 디자인을 구경하길 즐기는 그녀는 그것들을 스핀 온하여 'S&R' 제품 위에 녹여낸다. 방금 언급한 세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그녀의 일상으로부터 출발해 브랜드를 가꿔 나간다는 점이다. '나'의 세계로부터 작게, 하지만 더 큰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거창한 이야기보다는 개인적이고 소소한 이야기가 더 흥하는 시대다. 또 겉만 그럴싸한 브랜딩이 불공정한 과정이나 그릇된 목적의식을 결코 덮을 수 없는 투명한 사회다.
패션 브랜드 '스포티 앤 리치'는 창업자 '에밀리 오베르그'의 일상과 취향 그리고 철학의 확장판이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꾸준히 아카이빙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패션 스타일을 '스핀 온'해서 제품 속에 녹여냈으며, 그 중심에 건강한 메시지를 담아던졌다. 좋아하는 것의 단면이 잘 연마된 취향 있는 사람 주변에는 결국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법인데, 그녀는 그것을 '스포티 앤 리치'로 증명한 셈이다.
[프런트 이미지 출처: MISSB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