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눕피는 담백한 인프피
2020년, 이태원의 한 술집에서 나는 전 회사 동료들의 성화에 못 이겨 MBTI 약식 검사를 진행했다. 몇 분인가 고개를 숙이고 고분고분 묻는 질문에 성실히 답했더니 나는 '선의의 옹호자'라는 작위를 수여받을 수 있었다. 전문 용어로는 'INFJ'라고 했다.
나는 형, 누나, 동생들에게 검사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갸우뚱하다가 대부분 맞는 것 같기도 하다는 하나 마나 한 말로 나에 관한 화제를 대충 일단락하고, 이내 자신들의 MBTI 알파벳 하나하나를 서로 비교해 가며 깔깔거렸다. 술에 취해 목소리들은 어찌나 짜랑거리던지! 애초에 저러고 싶어 내게 MBTI를 물어본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즐거우면 됐지.
사람 많은 술자리에서는 말수가 더 없어지는 나는 저 구석탱이에 몸을 파묻고 고개는 처박으며 조용히 INFJ에 관한 성격 설명을 읽었고, 몇 번인가 되게 졸려서 하품하며 울고, 갑자기 또 어떤 말들이 엄청 재밌어서 웃다가 바보처럼 집으로 돌아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술이 깨고 며칠이 지나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미국의 원로 배우 '모건 프리먼'이 나와 같은 MBTI였다는 싱거운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내 엠비티아이가 정확히 뭐였더라?
나는 앞으로 MBTI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지겹도록 받게 될 것이었고, 관련해 잘 준비된 답변을 정성스럽게 내놓아야만 할 것이었으며, 둘째 자리 알파벳인 N과 S의 차이를 분명히 이해해야만 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大MBTI의 시대가 성큼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쩝.
그 이후로 나는 기왕이면 답변에 진실하고도 성실하고 싶어 몇 번인가의 MBTI 약식 검사를 더 진행했는데, 이때부터는 대부분 INFP라는 결과가 쭉 나왔다. 간혹 첫 검사 때처럼 INFJ가 나올 때도 있었지만(머릿속이 복잡하지 않고 개운할 때면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마음으로 계획형 인간을 호소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삶의 전반을 야무진 계획 하나 없이 일단 저지르며 살아온 스타일이었기에 첫 시도에서부터 이미 충분히 느꼈듯 INFJ라는 MBTI 인증 도장이 크게 와닿진 않았다.
아무튼 나는 이제 옹호자(INFJ)의 완장을 뜯어버리고, 무려 중재자(INFP)의 딱지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나는야 인프피 스눕피!
2019년과 2020년은 내가 한국 나이 셈법과 윤석열 각하 버전의 글로벌 나이 셈법으로 각각 서른이 되던 해였고, 대한민국의 MBTI 광풍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이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신비한 네 자리의 알파벳이 뜬금없는 중심 대화 소재가 되어 대한민국의 수많은 식사 자리와 술자리를 점령했다. 관련하여 하나의 MBTI 아래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깡그리 몰아넣고, 개인의 다양성 따위는 거뜬히 무시한 채 그들의 성격이나 라이프스타일을 함부로 단정하며 한방에 싸잡으려는 인터넷 밈과 커뮤니티 포스트가 성행했다. "씹프피는 걸러라"라는 식의 왜곡된 인간 필터의 뻔뻔스러운 과격함이라든지(씹프피의 다소 예민한 마음으로 걱정하건대, 나는 얼마나 많은 거름을 당했을까), 모든 N 보균자들을 현실 감각 없는 망상주의자쯤으로 치부한다거나 하는 그 폭력적인 단순성은 괜히 가만히 있는 사람을 긁거나 싸움 붙이기 좋아 보였고, 멀쩡한 사람을 괜히 잘게 또 속물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해 보였다. 어휴, 이만한 바이럴 콘텐츠가 또 어디 있겠냐구요! (그래도 재밌긴 해요;;;)
어느덧 상투적인 소재가 된 MBTI, 그것에 과몰입하는 사회의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MBTI를 알고 난 이후 나는 분명 한 사람을 조금 더 여러 면(낱낱의 조건을 몰랐다면 못 짚어봤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각도)에서 골고루 살펴보며 사춘기적인 자세와 함께 민감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이어가는 것 같긴 하다. 그것이 어쩌면 MBTI 사회적 열풍이 가져다준 순기능이라면 순기능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아, 그래서 저럴 수도 있겠구나, 쩝.
아, 이래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쩝.
더욱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말씀드리자면, INFP의 특징이랍시고 떠도는 출처를 알 길 없는 짤들 속에 묘사된 다소 이상하고 엉뚱하며 자극적인 성향들에 대해 그대로 전부 인정할 순 없지만 딱히 강하게 부정할 수도 없어서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는 것이다. 이러니까 씹프피 소리를 듣는 건가? 제길슨!
최종적으로 변명하자면, 아니, 부연하자면 저도 가끔 저럴 때가 있지만(개복치처럼), 수많은 씹프피들 중에서도 저는 꽤나 담백한 씹프피랍니다. 그런데 이런 제 말을 듣는 주변 사람들은 또 이렇게 덧붙이더군요. 지금 이렇게 부연하는 것도 인프피 같다고, 쩝. 잘난 척하지 말고 쿨하게 인정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겠군. 호달달;;;
[개복치가 추천하는 오늘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