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오션은 개인적인 의미를 갖게 만든다.
언젠가 이어령 선생은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을 읽고 나서 생애 처음으로 평론을 관두고 싶을 만큼의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는데, 덧붙이길 해당 작품을 통해 소설이 비단 스토리를 따라 전개되는 시간의 예술이 아닌 “그림처럼 공간을 창조하는 예술”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다소 멋쩍은 비유이지만, 프랭크 오션의 노래를 들을 때면 “그림처럼 공간을 창조하는 예술”이라는 이어령 옹의 멋진 표현이 오버랩된다.
네가 오기 전에 토네이도가 방 안을 휘몰고 지나갔어.
소란이 남긴 엉망진창은 이해해 줘.
여긴 원래 비가 잘 오지 않아. 남부 캘리포니아, 애리조나처럼.
난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데 말이야, 너만 생각하면 무너져 내리네.
- Thinkin Bout You
개인 블로거 따위가 (감히) 프랭크 오션을 들먹이는 것만으로도 평론가들의 일사불란한 합의가 쌓아 올린 성역을 건드리는 느낌이라 매우 조심스럽다. 사실 켄드릭 라마에 관한 글을 쓰려다가 몇 번인가 포기한 이유도 이와 같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최고 수준의 스타덤에 도달한 아티스트라는 수식어는 프랭크 오션의 슬프게 빛나는 숙명을 잘 말해주는 표현이다.
2000년대 후반, 프랭크 오션은 ‘로니(Lonny)’라는 필명으로 저스틴 비버, 브랜디와 같은 유명 아티스트를 위한 레퍼런스 트랙 작업을 진행하던 전문 송라이터였다. 2009년엔 데프 잼과 퍼블리싱 계약을 맺기도 했다. 그리고 2010년의 생일날, 이름은 전부가 아니고,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바꿀 수 있다면서 Frank Ocean으로 개명한다. 이후 타일러의 “Odd Future” 크루에 합류하고, 데뷔 믹스테이프와 함께 익명성 뒤에 숨은 송라이터에서 신비로운 작가주의 솔로 아티스트로 거듭난다.
나는 자꾸만 너를 떠올려.
혹시 너도 여전히 나를 생각하니?
정말, 아직도?
아니면 너는 그렇게 멀리 내다보진 않는 걸까?
나는 벌써 영원을 꿈꾸고 있는데.
- Thinkin Bout You
2010년 초, 프랭크 오션과 타일러는 친구가 됐다. 당시 타일러와는 달리 퍼블리싱 머니를 두둑이 챙겼던 프랭크 오션은 타일러에게 멋진 차, 좋은 음식 등 럭셔리한 삶을 체험시켜 주며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마인드셋을 일깨워줬다. 한편 타일러는 프랭크 오션에게 “DIY” 예술가의 정신을 훈련해 줬다.
자기 운명을 긍정하고 스스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이에게 축복을 빼면 생에 무엇이 남을까.
데프 잼의 음악 프로젝트 지연과 방치 속에서 2011년까지 프랭크 오션의 커리어는 답보 상태였다. 결국 그가 택한 길은 자가 앨범 발매였다.
2011년 2월 16일, 타일러에게 배운 DIY 스피릿을 밑천 삼아 그는 데뷔 믹스테이프(nostalgia, ULTRA.)를 Tumblr 블로그에 올려 무료 공개했다. 곧장 유명 레이블의 계약 연락이 쇄도하고, 평단의 호평이 끝없이 이어지며, 대선배들의 샤라웃이 쏟아졌다. 심지어 앨범의 관능적인 히트곡 Novacane은 R&B/힙합 차트 상위권에 올랐다.
자신의 목표와 존재 이유를 아는 아티스트가 철판처럼 단단히 예정된 성공의 길을 걸어가는 일은 정말 꿈결 같을 것이다.
2012년 7월 4일, 정규 데뷔 앨범 Channel Orange 발매를 일주일 앞두고, 프랭크 오션은 Tumblr 블로그에 공개 편지를 올렸다. 편지 내용은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였고, 상대는 한 남자였다.
"4년 전 여름, 누군가를 만났다. 나는 열아홉이었고, 그도 그랬다. 우리는 그 여름을, 그리고 그다음 여름도 함께 보냈다. 거의 매일같이. 우리가 함께하던 날들엔 시간이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하루 종일 나는 그를 보고, 그의 미소를 보았다. 그의 목소리, 그의 침묵까지도…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와 함께 나누곤 했던 그 잠까지도.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깊이 스며 있었다. 희망이 없었다. 도망칠 수도, 그 감정과 타협할 수도 없었다. 선택의 여지도 물론. 그것은 내 첫사랑이었고, 내 삶을 바꿔놓았다."
업계의 커밍아웃은 그가 처음도 유일도 아니었지만, 더는 감춰야 할 비밀이 없다며 자유를 선언하는 아티스트의 내밀한 고백은 곧이어 공개한 데뷔작의 풍부한 질감과 세련된 사운드를 이해하는 필수 가이드북이자 문학 같은 노랫말의 세심한 각주가 됐다.
2012년 7월 10일, 드디어 발매된 채널 오렌지, EDM, 트랩, 팝 R&B가 성행하던 그때, 앨범에는 새로운 감각을 기다리던 시대적 공백과 문화적 결핍을 메우기에 충분한 ‘남다름’이 분명 있었다. 트렌디한 음악 구성과 악기 같은 보컬. 섹스, 마약, 계급, 사랑, 종교, 공허한 삶, 부유한 아이들과 같은 다채로운 주제. 그것들을 노래하는 프랭크 오션의 우울한 마음과 나른한 욕망, 슬픈 냉소와 문학적 은유 그리고 유머까지. 그의 천부적인 예술성에 홀딱 반한 인터넷 세대는 그의 어떤 노랫말처럼 광적으로 맹신하며 떠받들 우리들만의 컬트 스타를 탄생시켰다.
이 외로운 짝사랑은
혼자만의 광신,
플라스틱 컵에 든 독약.
그의 사랑을
얻을 순 없을 테니.
- Bad Religion
Channel Orange, 겨우 24살, 천재 아티스트의 복잡하고 성숙한 내면세계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수작, 이질적인 트랙 간의 기묘한 하모니, 고르지 못한 미완의 매력 때문에 왠지 더 예술 같이 느껴지는 신비로운 앨범. 웹 덕후 쿨 키즈와 까다로운 취향가 그리고 엄근진 평론가의 넋을 쏙 빼놓은 작품의 마력은 짙고, 십 년 넘게 이어지는 도를 넘은 찬탄이 작품을 팽팽하게 둘러싼다.
ㅂㅂ ㅂㄱ, 반박 불가.
그리운 나의 이십 대, 인천에서 서울로, 다시 서울에서 인천으로 부지런히 쏘다니던 등하굣길의 광역 버스 위에서 질리도록 즐겨 듣던 앨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수많은 날들, 낮과 밤의 경계, 오렌지 빛으로 물드는 차창 밖의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때의 나는 무슨 고민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던 걸까.
"채널 오렌지는 이상하게 개인적인 의미를 갖게 만든다"라던 어떤 평론가의 말씀이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서른여섯의 늦여름이다.
■ 오늘도 난 너란 말이야!
https://youtu.be/6JHu3b-pbh8?si=gNbDPhPCDR_7cM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