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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Oct 30. 2022

마음에 담은 코코넛


 


 발리 동쪽을 여행하고 있다. 친구 부부와 아이, 나까지 합해 어른  아이 하나가 함께 하는 여행이다. 어린이의 방학을 맞아 카랑아셈, 짠디다사를 지나 아메드에 가서 스노클링을 하는 보름간의  여행 계획을 세웠다. 가는 길에 들러보고 싶은 곳을 찾으면 즉흥적으로 일정을 바꾸기로 했다. 여행 첫날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던 동쪽 하늘의 노을이 아름다워 깜짝 놀랐다. 스미냑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분홍 보랏빛 노을을 매일   있었다. 숙소 바로 앞에는 바다가 있다. 이른 아침부터 스노클링 하던 어린이가 큰소리로 엄마와 이모를 부른다. 가까이 가보니 벽돌 반만  직사각형 모양 물고기가 파닥거리고 있다. 생긴  재밌다. 네모 반듯한 물고기는 난생처음 본다. 이름을 찾아보니 박스 피시(Box fish)란다. 직관적인 이름이다. 카랑아셈 숙소 근처엔 50 전통의 이칸 페페스 가게가 있다. Ikan 생선, pepes 바나나 잎으로 싸서 굽는 조리 방식을 말한다. 시골 할머니 댁이랑  닮은 낡은 가정집에서 벽돌을 쌓아 만든 아궁이에 바나나 잎으로  생선을 잔뜩 굽고 있다. 가게는 조그마한데 생선구이가 어림잡아 백개쯤 구워지고 있다.  많은 생선을 언제  팔까 싶은데 근처 결혼식에서 대량 주문이 들어왔단다. 삼대가 함께 일하고 있는 오래된 가게에서 전통 방식으로 조리된 음식을 먹고 있으니 걸어서 세계 속으로 주인공이라도   특별한 기분이다. 가까운 곳에는 연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연못이 있다. 연못 하나 가득 꽃이 피어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커다란 연못에 가뭄에  나듯 꽃이 드문드문 있다.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다. 연꽃을   있는 시기가 따로 있다는  처음 알았다. 아쉬운 마음은 다시 이곳에 와야  이유로 바뀐다. 바다가 아름다운 버진 비치로 가는 길은 귀가 먹먹해질 만큼 지대가 높았다. 어린이는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이 신기하다며 작은 손바닥으로 귀를 통통 두들긴다. 침을 꿀꺽 삼키면 다시 귀가  들릴걸 웃고 떠드는 사이 언덕 꼭대기에 다다랐다. 나무 사이 빈틈으로 한눈에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발리 날씨가 어찌나 맑고 깨끗한지 작은 지붕들마저 선명하게 보여 시력이 좋아진 것만 같다. 코로나로 관광객이 뜸한 버진 비치에선 발리 사람들이 연을 만들고 있다. 어느새 연을  만든 팀은 모터 달린 배에 실을 연결해 연을 날리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연이 파란 하늘 배경 삼아 구름에 걸려있으니  폭의 그림이다.

50년 전통의 페페스 이칸 

짠디다사에서는 전통 마을에 갔다. 뜽아난 빌리지는 발리 원주민들이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마을이라고 한다. 마침 우리가 간 날 마을 행사가 있어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만들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본 물소들이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 양쪽에 달린 뿔이 두껍고 무섭게 생겼다. 논 많은 발리에서 누렁소는 길거리 강아지만큼 많이 봤는데 물소는 처음 본다. 풀 뜯어먹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풀 씹는 소리가 마치 배추김치 우걱우걱 씹는 소리 같아 정답다. 귀여운 소리에 긴장이 풀려 가까이 가보니 무서운 뿔 대신 깊고 검은 눈동자가 보인다. 어찌나 순하던지 손을 뻗을 뻔했다. 물소 옆에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좌판이 있다. 마카다미아 왁스로 달력을 만들고 발리의 신들을 그리는 할아버지는 환한 미소로 오랜만에 나타난 관광객을 반긴다. 한눈에 보기에도 최소 40년은 마카다미아 아트를 했을 것 같은 할아버지의 손톱 아래 갈색 물이 진하게 배어있다. 장인의 손길에서 정교한 그림이 탄생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할아버지의 손길이 지나는 곳에 힌두의 신들이 살아 움직인다. 발리니스의 손재주에 또 한 번 감탄한다.


마카다미아 잉크로 그린 달력, 풀을 뜯고 있는 물소

재영 오빠가 묻는다. "하나는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이럴 줄 알고 어젯밤부터 찾아뒀다. 구글맵에 아궁산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이 있다. "Bukit Lemped에 가고 싶어요." 산 중턱 언덕에서 하늘을 마주 볼 수 있는 곳이다. 고즈넉한 느낌에 나무들이 우거지고, 손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까운 하늘이 사진으로 보기만 해도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곳이다. 마침 전통마을에서 멀지도 않다. 우리는 해가 지기 전 산길을 오르기 위해 서둘러 장소를 옮긴다. 언덕을 보고 내려와서 저녁을 먹으러 가면 되겠다며 손뼉을 쳤다.


지도를 따라 차량 한 대가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좁은 골목을 올라간다. 우리가 탄 차는 SUV인데 올라갈수록 길이 점점 좁아지고 있어 반대방향에서 오토바이나 차가 오지 않기를 속으로 빌고 있다. 슬슬 아스팔트 도로가 끝나가고 있는데 도무지 주차장이라고 할만한 곳이 나타나지 않는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꼼짝없이 산으로 차를 끌고 올라가야 할 땐 초입에서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했다. 우리는 워낙 험악한 길을 많이 다녔고 그 길들 끝에선 언제나 가고 싶은 곳을 찾아냈으니 이번에도 가보자 하고 산속 흙길로 차를 끌고 올라간다. 발리 산길이 차량 지나가기에 수월 할리 없다. 울퉁불퉁한 돌들에 한참을 덜컹거리며 올라가고 있지만 점점 좁아지는 산길은 끝이 안 보이고 설상가상으로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다들 말수가 적어졌고 이제는 차를 돌리려야 돌릴 수도 없다. 이미 깊은 산속이라 인터넷 연결도 안 된다. 어지간해선 이런 길에 겁을 안 내는데 슬쩍 쳐다본 낭떠러지가 구만리다. 바퀴가 조금만 틀어져도 아찔한 상황이 올 것 같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차를 돌릴 공간만 있다면 바로 내려가자고 조르고 싶은데 낭떠러지 외길이 끝나질 않는다. 지금 제일 무서운 건 운전하는 사람일 테니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본다. 차 안 공기가 날카로운 와중에 어린이가 웃음이 터져 긴장이 풀렸다. 영겁 같은 30분이 지나고 드디어 공터를 발견했다. 공터에 세워진 석탑마저 반가워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다. 막상 주차를 하고 보니 덜덜 떨면서 올라온 낭떠러지는 까맣게 잊고 또 욕심이 난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목적지에 가보기로 했다. 운동화로 갈아 신고 다시 산길을 하염없이 걷는다. 지도엔 걸어서 10분이라고 나와있는데 30분을 걸어도 도착할 기미가 없다. 지나는 사람 하나 없어 우리가 정말 길을 잃었구나 큰일 났다 생각했는데 마침 구세주처럼 마주친 동네 주민이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알려준다. 다시 발길을 재촉한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인데도 깊은 산속에서는 작은 산짐승 움직이는 소리마저 크게 들려 멧돼지라도 나타난 양 깜짝깜짝 놀랐다. 울창한 열대 우림 덕에 해가 다 가려져 금방이라도 캄캄해질 것만 같다. 주영이가 "우리들 집에 못 가면 어떡하지?" 겁을 낸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안심시켰지만 내가 이 겁 많은 친구를 끌고 이런 곳을 오다니 조금 후회가 됐다. 우리 중 제일 신난 사람은 어린이다. 날다람쥐처럼 산길을 잘도 뛰어다닌다. 어린이를 쫓아 뛰다 보니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열대 우림 사이 침엽수가 보이는 걸 보면 더운 곳도 아닌듯한데 긴장 탓인지 달린 탓인지 땀으로 세수를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민가를 발견했다. 나이가 지긋한 농부 아저씨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전혀 길처럼 보이지 않는 나무숲 사이를 가리키며 조금만 더 내려가면 된다고 했다. 못 가본 길에 미련이 남을까 싶어 무성한 풀숲을 헤치며 내려가는데 길이 너무나 험하다. 가파른 내리막 바위틈으로 발을 디디다 신발이 미끄러지는 어린이를 보며 아쉽지만 이쯤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혼자라도 가보겠다며 떠난 재영 오빠를 기다리며 아까 길을 물어보았던 작고 허름한 농가 옆을 서성인다. 깊은 산속엔 코코넛 나무들이 많았다. 갖은 고생을 다했더니 갑자기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게 느껴졌다. 마침 농부 아저씨가 코코넛을 마시겠냐고 물어왔다. 발리에서 호객행위는 흔한 일이다. 다만 여기는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산속이기에 여기서마저 누군가가 뭘 사라고 권유하는 게 신기했다. 녹슨 칼이 눈에 띄었지만 지금 당장 뭘 마시지 않으면 우리 모두 쓰러질 지경이다. 코코넛 두 개를 주문했고 아저씨의 막내아들이 다람쥐처럼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코코넛 두 개를 따왔다. 어찌나 빨리 나무를 올라가는지 원숭이랑 시합해도 이길 것 같아서 갈증도 잊고 넋 놓고 쳐다봤다. 아저씨가 녹슨 칼로 코코넛을 쪼개는 동안 빨대 없이 코코넛을 마실 수 있을까 걱정을 했다. 언젠가는 반짝이는 은빛이었을 칼이 지금은 멀쩡한 부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녹이 슬어있다. 저 칼로 코코넛을 쪼개고 저기다 입대고 마시면 우리 오늘 배 아플 수도 있겠다 그래도 괜찮아 지금 저거 안 마시면 쓰러져 농담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아저씨의 코코넛 쪼개는 방법이 신기하다. 코코넛 윗부분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라 10cm쯤 잘라낸 뒤 코코넛 이파리를 말아 끼우고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라둔 코코넛 조각을 덮으니 코코넛 이파리가 주전자 주둥이 역할을 해 빨대 없이도 깔끔하게 코코넛을 마실 수 있다.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영리한 방법이다. 손이 닿았던 부분에 코코넛을 살짝 따라내 헹구어주기까지 하니까 으리으리한 카페 부럽지 않다. 한 모금 들이키니 타는듯한 갈증이 사라진다. 매일 마시는 코코넛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달고 맛있어서 코코넛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다니 눈빛을 주고받으며 감탄했다. 계산을 하려고 가방을 반쯤 열고 가격을 물어보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곤란한 표정이 된다. 눈썹이 축 처진 얼굴로 손사래를 친다. 그냥 코코넛을 마시고 정자에 앉아서 쉬었다가 가란다. 갑자기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끄뚯 아저씨는 처음부터 우리한테 코코넛을 마시고 쉬었다 가라고 권했던 것이었다. 내 멋대로 호객 행위를 한다고 생각해버리고선 아저씨의 마음에도, 나무를 타고 올라간 저 어린아이에게도 오해를 했다. 그래도 감사의 마음으로 사례를 하고 싶다고 연거푸 물었지만 끄뚯 아저씨가 한사코 거절해서 엉거주춤 정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아까 다람쥐처럼 나무를 타던 막내아들은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하루에 왕복 네 시간 산길을 달려 학교를 간다고 했다. 이 깊은 산속엔 티브이도 없고 한 달에 한번 장을 보러 시내에 가는 게 외출의 전부라고 했다. 인적 드문 산속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흔치 않은데 오늘 이렇게 손님이 와서 기쁘다는 끄뚯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알량하게 코코넛 값을 치르겠다고 우겼던 게 부끄러워진다. 주름진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띠며 오늘 한국사람을 처음 만나봐서 너무 반갑고 기쁘다고 말하는 끄뚯 아저씨가 다정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때마침 혼자 산길을 헤치고 내려간 오빠가 돌아왔다. 멋진 풍경을 담아왔다며 카메라를 보여줬는데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장관이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푸른 잔디가 드넓게 펼쳐져있고 이제 막 지기 시작한 노을이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이 멋진 장면을 눈으로 보지 못한 것에 아쉬운 마음이 덜하다. 우리에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코코넛과 끄뚯 아저씨의 따뜻한 마음이 있으니까. 


 때론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길을 잃어도 괜찮다. 길을 잃은 끝에 만난 코코넛 한 통으로도 세상이 환해질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끄뚯 아저씨의 친구들이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워 우리가 차를 세워둔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불과 한 시간 전 같은 길을 지날 땐 무섭기만 했던 울창한 숲도 이제는 정답게 느껴진다. 열대우림 특유의 커다란 이파리들이 뜨거운 햇빛을 가려줘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끊임없이 노래하는 새들이 우리에게 잘 가라고 인사한다.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며 끄뚯 아저씨에게 한 번 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눈을 마주치면 웃으면서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발리는 참 덥고 따뜻한 곳이다.


막막했던 산길, 사진으로만 본 Bukit Lemped
다람쥐처럼 나무를 타는 끄뚯아저씨의 막내아들, 빨대없이도 마실 수 있는 코코넛 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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