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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량 Dec 01. 2019

도시의 밤과 올드 패션드

Forever old, never go out of fashion

평생 단 하나의 칵테일 밖에 마실 수 없다면?


하나를 고르는 건 너무 어렵다. 하지만 굳이, 정말,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올드 패션드를 고를 것이다. 왜? 짧게 말하자면 맛있으니까. 길게 말하자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충분히 fashionable 하니까.

이제는 문 닫고 없는 이태원 리버틴 (이미지 출처: 네이버 블로그 alsk0987)

처음 올드 패션드를 주문한 것은 2015년 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겨울밤, 이제는 문을 닫고 없는 이태원의 리버틴이라는 레스토랑에서였다. 캐나다 동부에서 10년을 살다온 나는 북미에 대한 향수가 짙어질 때면 이태원을 찾곤 했다. 정신없는 해밀턴 호텔 골목 안쪽에 조용히 자리한 리버틴은 특히 좋아하는 장소중 하나였다. 그곳에는 뉴욕을 표방하는 차가운 도시의 세련됨과 아메리칸 다이닝 특유의 캐주얼함이 있었다. 평소에는 와인이나 맥주를 마셨겠만 그 날따라 추운 날씨에 어울리는 독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 몸을 후끈하게 데워줄 위스키 같은. 그래서 고른 것이 위스키 베이스의 칵테일인 올드 패션드였다.심플한 온더락 잔에 투박한 얼음과 함께 진득한 시럽 같은 칵테일이 담겨 나왔다. 비주얼부터 합격. 일단 온더락 잔이 좋았다. 허례허식 없는 클래식함이 있었으니까. 여름보다 겨울에, 낮보다 밤에 어울리는 묵직한 다홍빛도 좋았다. 한 모금 머금으니 훅 올라오는 알코올 향. 그리고 따라오는 진한 달콤함. 맛있다. 그리고 boozy하다. 고독하고 흥겨운 계절에, 이 도시의 밤과 저 도시의 밤이 통하는 공간에서, 적당히 흐트러져도 좋은 사람들과 마시기에 아주 적합했다. 그리고 그대로 천천히 바닥까지 핥아 마셔버렸지. 첫인상의 영향이었을까. 그 이후에도 그 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올드 패션드를 마셨다. 공간에, 분위기에, 사람에 취하고 싶은 멋진 도시의 밤에.


단순한 레시피, 단순 명료한 맛


마티니, 맨해튼과 함께 아메리칸 클래식 칵테일 삼두마차로 알려진 올드 패션드의 레시피는 단순하다. 버번 또는 라이 위스키, 설탕, 앙고스투라 비터즈 (angostura bitters)와 약간의 물이 재료의 전부다. 그리고 가니쉬로 사용할 오렌지 껍질과 순식간에 녹아버리지 않을 (그래서 잘 만들어진 칵테일을 맹탕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을)  얼음까지 더하면 금상첨화다. 재료가 물을 포함해 고작 4개라는 것은 각 재료의 맛에 대한 지분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위스키. 꼭 최상의 위스키를 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섞을 테니 값비싼 바틀은 스트레이트나 온더락으로 마실 때를 위해 아껴두자. 하지만 너무 단 버번이나 스파이시한 라이는 피하는 게 좋다. 전자는 설탕과 더해져 너무 달아질 수 있고 후자는 위스키의 향이 칵테일의 조화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vinepair.com

비터스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보자. 1806년 칵테일을 가장 처음으로 정의한 미국의 신문에 따르면 칵테일은 "증류주, 설탕, 물과 비터스"로 구성된다. 여기서 비터스란 허브, 향신료, 꽃 등 각종 식물을 배합해서 만든 농축액을 말하는데, 아주 소량을 사용해 칵테일에 풍미를 더하거나 각기 다른 재료의 맛을 중재해주는 역할을 한다. 올드 패션드에 쓰이는 앙고스투라 비터즈는 독일 군의관이 만들었다. 소속됐던 남아프리카 군대의 식욕과 소화, 원기 증진을 위해 사용했다고 하니, 올드 패션드를 식전주로 마시기 적합한 이유가 있다. 앙고스투라 비터즈 본연의 쓴 맛은 설탕에 중화되고 클로브 시나몬 향이 위스키에 스파이시함을 더한다. 여기에 오렌지 껍질 표면의 오일이 알코올에 녹아들어도 좋다. 그래서 무슨 맛인데? 약간의 씁쓸함과 스파이시함이 묵직한 달콤함과 함께 혀부터 목구멍 저 아래까지 감싸주는 맛이다. 시럽에 절여진 체리를 올려주는 곳이 간혹 있는데, 그런 날은 그냥 생맥주를 마시는 걸로 하자. 


Old-fashioned, but never out of fashion


코카콜라는 오리지널이 채고시고 여자들 옷장과 화장대엔 리틀 블랙 드레스와 레드 립스틱 하나쯤은 있어야 하듯 클래식은 돌고도는 유행에 뒷전이 될지언정 뒤처지지 않는다. 가장 안전한 옵션이라 식상할 때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빛을 발하는 것 또한 클래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드 패션드는 이름과는 다르게 언제나 패셔너블하다. 가장 핫해질 일도 없지만 잊힐 일도 없다.


한 가지 더 - 올드 패션드는 독주로서의 정체성이 명확한 위스키 베이스인 데다가 예쁜 잔이나 장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남자들의 칵테일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때문에 남성 동지들과 함께일 때 올드 패션드를 주문하면 서버는 백이면 백, 주문자를 헷갈린다. 그래서 올드 패션드는 또 한 번 패셔너블하다. 지금은 2019년 말이고, 남자가 케이크에 마리아쥬 프레르 티를 주문하고 여자가 올드 패션드를 주문하는 게 아직 흔하지는 않을지언정, 눈총을 주는 사람이 old-fashioned인 시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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