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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river Jan 14. 2024

미안해.

몇 번이나 글을 쓰려고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20년 동안 내게 있었던 일들을 써 내려가려고 하니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 거야. 아니,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래서 일단 '오늘'의 일상부터 써 내려가볼까 해. 

아, 나 지금 미국에 살고 있어. 미국에 온 지는 이제 13년 차가 되어 가네. 나 영어 잘하냐고? 아니. 영어는 내 평생의 애증 어린 동반자가 되지 싶어. 그래도 십 년 전의 나에 비하면 눈치도 많이 늘고,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 스킬도 늘었다고는 할 수 있지. 예전에는 정확한 문장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아예 입을 열지도 않은 적이 있었어. 아마 마음의 문도 닫은 상태였을지도 몰라. 그냥,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싫었어.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대화하다 보면 답답할 때가 많았거든. 상대방의 의중도 잘 모르겠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하지 못하고. 그냥 small talking 수준에서 머물다 보니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귀찮아지더라고.

상상이 안 가지?

고등학생 때의 내 모습은... 인싸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싸와는 거리가 멀었잖아. 뭐, 우리 학교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아 맞다. 나 오늘의 일상을 쓴다고 해놓고 이러고 있네.

보자.

오늘은 토요일이었어. 아침까지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바나나와 검은콩 두유를 먹었어. 미국인데 검은콩 두유가 있냐고? 한인 마트에서 샀지. 하하. 아니, 얼마 전에 처음으로 셀프 새치 염색을 했거든. 슬펐어. 내가 너무 늙은 것 같아서. 마음은 하나도 안 늙은 것 같은데 말이지. 그래서 검은콩 두유를 산 거야. 흰머리가 좀 더디게 날까 싶어서. 효과가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너의 포니테일 스타일이 기억나. 그런데 다른 아이들과는 좀 달랐어.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간지 나는' 포니테일이라고나 할까? 층이 많이 있는데 이리저리 뻗지 않고, 뭔가 물결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듯한 그런 거. 대충 묶은 것처럼 보였는데 참 이뻤단 말이지?

지금 너의 헤어스타일도 궁금하다.

자, 다시 나의 일상으로 넘어가서, 점심으로는 보리를 섞은 잡곡밥에 참기름을 살짝 두르고 계란 프라이 2개와 씨앗 젓갈을 한 스푼 넣어서 비벼 먹었어. 씨앗 젓갈도 한인 마트에서 샀어. 톡톡 씹히는 게 맛나더라고. 몸에 좋은지는 모르겠다.  

아 나 미역국도 먹었어. 진한 사골육수를 넣어서. 얼마 전 시부모님이 오셨을 때 살림 잘하는 며느리처럼 보이려고 며칠 동안 고았던 사골 육수야. 제법 맛있었어. 

그러고 보니 계속 먹는 이야기만 하고 있어서 좀 부끄럽네. 아, 오늘이 어제와 달랐던 점은 낮잠을 한 시간이나 잤다는 거야. 소파에 앉아서 오랜만에 막내에게 책을 읽어 주는데, 마지막 장이 끝남과 동시에 잠이 들어 버렸어. 아니, 이것도 노화와 관계가 있을까? 예전의 나에게 낮잠이란 매우 낯선 행위였거든. 그런데 요즘은 책을 읽다가 잠들기 일쑤야. 나의 뇌가 지식 흡수와 멀어지고 있어서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좀 슬프네.

출판사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들었어. 너와 어울려. 

나는 어떤 책을 읽냐고? 

난 집 안 여기저기에 책을 두고, 그때그때 당기는 걸 읽는 편이야. 왜 날씨에 따라 당기는 음식이 있는 것처럼 책도 비슷한 것 같아.

최근에 '상실의 시대'를 끝냈어. 아, 이 책과 관련된 웃긴 에피소드가 있어. 아는 동생이 한국에 다녀오는데 혹시 필요한 게 있냐고 해서 내가 책을 사다 달라고 했거든. 그게 '상실의 시대'였고. 난 그렇게 야한(!) 묘사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거든. 그 아는 동생은 남자야. 나에게 책을 건네주면서 무심코 열어봤는데 너무 야해서 깜짝 놀랐다는 거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웃으며 대답했지. 어머, 나도 몰랐다고, 유명한 책이라 부탁한 거라고 말이야. 

아, 오늘 읽은 책은 Patricia Polacco라는 아동 작가의 그림책, 'The Mermaid's Purse'였어. 요즘 내가 이 작가에게 빠져 있거든. 

신나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적어 내려가다 보니 너무 길어지네. 미안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또 올게.

너의 하루가 많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 음악 추천을 해도 되려나. 네가 브런치에 쓴 글에서 음악이든 영화든 추천받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는데 말이지. 

안 들어도 좋아. 지금 내가 듣고 싶은 노래를 남길게. 


스웨덴 세탁소의 '우리가 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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