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모 아니면 도다!
인생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다는 게 참 재밌다.
언제나 내가 생각을 한 대로, 예상을 한 대로만 일이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러다가도 한편으로는 참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 날의 일도 그랬던 듯하다. 어쩌면 나는 위기에 강한 타입이었을까? 나의 새로운 능력을 발견한 계기이기도 했다.
사건은 자소서 제출 당일에 일어났다.
당시 우리 기수에서 TO 소식은 처음이었고, 그것이 공중파라는 것은 더욱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기수에서 예능국으로 방송작가를 지망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자소서를 준비했다. 거의 20명 가까이 되었던 듯하다. 그런데 한 번 거르고 싶었던 운명의 장난일까. 아침부터 기대에 부푼 우리들에게 주어진 건 얼음장같이 찬 물이었다. 바로 담당 선생님이 프로그램 이름을 착각해 잘 못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진짜 말 그대로 '갑분싸'의 현장. A 프로그램에 맞춰 쓴 자소서가 무용지물이 된 순간이었다.
진짜는 위기에 빛을 발한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나의 숨겨진 능력 얼른 깨어나라! 프로그램 명을 착각해 알려준 담당 선생님은 미안하다며 수업을 빼줄 테니 다시 준비할 사람들은 준비하라고 했다. 자소서 제출까지 남은 시간은 단 3~4시간 정도.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인데 포기로 끝을 내고 싶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은 취사 버튼을 눌러보자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다시 B 프로그램에 맞는 자소서를 준비하기 위해 최근 B 프로그램의 방송 회차를 다운로드하여 보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니 이상하게 더 꿈이 간절해졌다. 연습 삼아 해보자고 생각하며 준비했던 것이 진짜가 된 것이다. 갑작스럽게 승부욕이 발동한 셈이다. 이제는 나는 이걸 꼭 해내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탓에 무언가를 꼼꼼하게 준비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은 방송을 1.5배속으로 빠르게 봤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어떠한 아이디어 하나가 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에 맞게 나는 빠르게 자소서를 써 내려갔다.
어쩌면 나, 기지라는 게 있을 지도.
순간적으로 번뜩인 아이디어는 나 스스로를 기특하다고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모 아니면 도다. 이것이 먹힐 수도 있고, 오히려 반감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당시 나에게는 그걸 고민할 시간이 마땅하지 않았다. 이제 그 후의 일은 운에 맡기자는 생각에 나는 눈을 질끔 감고 자소서 제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거의 포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게 경험이라는 것이지'. '처음부터 잘 될 수는 없지'란 생각으로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자소서를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더 진지하게 임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즉, 나에게 있어서 이번에 촉박한 시간에 휘갈긴 자소서는 통할 거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나의 자소서는 너무나도 모험이었다. 이건 1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이게 어떻게 됐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세상 일이란 참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진다.
그렇게 나의 자소서는 우리 기수에서 유일하게 채택이 됐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이 과정을 다 함께 겪은 같은 기수 동기들은 나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어리둥절한 상황. 아마 그들은 내가 짧은 시간에 정말 완벽한 자소서를 썼을 것이라 기대했나 보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다음 면접에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나의 자소서를 오픈했다.
그리고 모두의 머리 위에 뜬 물음표 하나. '이게 된다고?'. 나도 그게 참 의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