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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Choi 메덴코 Dec 05. 2023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와 함께 울어준 덴마크인

새벽 1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를 투벅 투벅 걸으며 버스 정류장 앞으로 갔다. 빨리 집으로 가서 고된 몸과 뭉개지고 헐어버린 마음을 달래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추운 덴마크의 3월, 그날따라 버스는 오지 않았고 모든 게 서럽게만 느껴졌다. 온몸에 힘이 빠져 결국 버스 정류장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집에 가서 울려고 꾹꾹 참았는데 결국 비까지 오는 바람에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누군가 나를 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미 터져버린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꺼이꺼이 울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다가와 나를 안아주며 함께 흐느끼기 시작했다.


평소의 나 같으면 자지러지게 놀라 소리를 질렀을 텐데 그냥 그 상태로 펑펑 울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한참을 울고 고개를 들었는데, 난생처음 보는 여자가 나와 함께 쪼그리고 앉아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한 파란색 눈동자에 고인 눈방울과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왠지 더 서글퍼져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던 그녀는 내가 진정이 될 때까지 함께 울어주며 나를 다독였다. 내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내게 괜찮냐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자정이 넘도록 내가 집에 가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인종차별과 괴롭힘 때문이었다. 2015년 처음 덴마크에 워킹홀리데이를 왔던 나. 정말 맨 땅에 헤딩하듯 온 덴마크에서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추운 겨울 직접 이곳저곳을 찾아가 이력서 200장을 돌리고 나서야 한 레스토랑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곳엔 나 빼고 모두가 백인이었고 대부분 동유럽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에스토니아, 불가리아, 로마니아, 독일 등.


첫날부터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질문을 해도 대답해주지 않았고, 이곳에 아시아인이 근무하는 건 처음이라는 말부터 시작해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둥 직감적으로 이건 텃세라는 것을 깨달았다. 해외생활이 처음도 아니고 인종차별을 일상처럼 당해본 나는 맷집이 생겼을 거라 생각했다. 이쯤이야 그냥 참고 견디면 된다는 마음으로 일터에 나갔다. 잘 지내보고 싶어 편지도 써보고 아무렇지 않은 척도 해보았지만 날이 갈수록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정도가 심해져만 갔다. 하지만 나는 힘들게 얻은 첫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아서 참고 또 참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평소라면 둘이서 해야 하는 마감을 나 홀로 해야 한다며 모두가 퇴근을 했다. 텅텅 빈 넓은 레스토랑을 닦고 쓸었다. 보통 11시 전에 끝나는데 홀로 모든 것을 다 하려니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청소를 다 하고 집에 가려고 열쇠를 찾는데 보이질 않는 것이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도 없고 이곳저곳 다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동료들 모두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 누구도 받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군가 키를 일부러 숨겨뒀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주방 매니저에게 연락을 했다. 40분쯤 지났을까? 그가 가게로 왔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본인이 괴롭힘 당하는 거 알고 있죠? 굳쎈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겠어서요. 너무 힘들 것 같네요. 미안해요. 내가 도움이 안 돼서."


그제야 누군가 고의로 열쇠를 가져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알고 있었는데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모른 척했던 건 아닐까 싶다. 주방 매니저덕에 가게 문을 잠그고 반대편 버스 정류장 앞으로 갔다. 정적만이 흐를 뿐이었고 무척이나 고요했다.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버스가 오려면 한참 시간이 남았고, 춥고 상처받은 마음을 꾹꾹 누른 채 서 있는데 비까지 내렸다. 하늘도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게 덴마크까지 왔는데 왜 또 내게 이런 시련을 주는지, 이런 고난을 겪게 하는지 현실을 원망하며 울고 있던 순간 그녀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내게 어디가 아픈지, 어디를 다쳤는지 혹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으며 함께 울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마음씨 착한 그녀는 자기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를 물었다. 어디서 온 사람인지 혹시 부모님 또는 가족이 그리운 건지를 물었다. 본인은 덴마크 사람이지만, 코펜하겐 사람이 아니라 때때로 외롭고 힘들 때가 많은데 당신은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왔으니 더 그럴 수 있다며 나를 달랬다.


내가 숨이 찬 상태로 울며 일터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하니 본인의 마음이 찢어진다며 나를 꽉 안아주던 그녀.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며 같이 계속 울던 그녀. 누군가의 저 한마디와 포옹과 체온이 어찌나 따뜻한 지 거의 10년 전 일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때를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다. 그렇게 버스가 도착했고 나와 함께 버스를 탄 그녀는 나를 토닥여주며, 나를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내가 괜찮다고 하자 혹시 지금 갈 곳이 없거나 혼자 있기 싫으면 본인에 집에 와도 된다던 천사 같던 사람. 어느덧 많이 진정이 된 나는 너무 고맙다고 했다. 이제 괜찮다고 혼자 집에 갈 수 있다고 말하자 그녀는 나를 걱정하며 떠났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울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생각해 보니 경황이 없어 그녀의 이름도 묻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가 밀려왔다. 우는데 정신이 팔려 그녀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금발에 아주 아름다운 파란 눈을 가졌다는 것만 기억이 날 뿐이었다. 어젯밤 일이 마치 꿈만 같이 느껴졌다. 내게 처한 상황은 현실임을 알겠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나를 위로해 주고 떠난 느낌이랄까.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는 것처럼, 먼 타지 땅에서 홀로 어려움을 겪는 내 옆에 엄마가 없으니 신이 잠시 천사를 내려보내신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날 밤 그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덴마크는 내가 있을 곳이 안된다며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을까? 혹은 얼마나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다 집에 갔을까? 그때 그 일을 여전히 가끔 떠올리며 생각한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을 가끔 그리워한다. 영화 같고 드라마 같은 그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지금도 여전히 일했던 레스토랑과 그 버스 정류장을 지나갈 때면 괜스레 마음이 아려온다. 그저 힘들었던 시절 때문이 아니라 그녀 덕분에 일어설 수 있었던 위로받았던 그 장면이 스쳐 지나가며 마음이 따뜻해지고 감사함을 느낀다.


내가 덴마크에서 만난 그리고 가장 첫 번째로 기억에 남는 사람은 바로 이름도, 성도, 심지어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덴마크인이었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을 텐데, 함께 앉아 슬퍼해주고 억울해해 주던 사람. 분명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가 아니었을까.


살면서 한 번쯤은 우연히라도 다시 마주치고 싶다. 그녀도 나도 서로 알아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꼭 고마웠다고, 여태 잊지 않았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살면서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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