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 나의 직속 상사의 매니저에게 이메일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 8시쯤 메일이 도착했다.
“써니,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너무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말 몰랐어요. 오늘 회사에 와서 이야기해서 풀어요. 혹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그것도 이해해요”
몰랐어도, 알았어도 그녀는 디렉터 자격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녀가 몰랐다는 것은 순 변명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서 이제 화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한 달도 훨씬 전, 나는 그녀에게 1:1 면담을 신청했었다. 그녀는 바쁘다며 2주 후에나 시간이 비는데 그때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었다. 그런데 당일날 그녀가 나타나지 않아 구내식당으로 홀로 올라갔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점심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내가 스케줄을 잘못 보았나 싶어서 다시 보아도 아무리 보아도 나와 점심약속이 있었다. 워낙 바쁜 사람인지라 까먹었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으로 옆에 앉아 그녀에게 말했었다.
“저희 오늘 면담 약속 있었는데.. 잊어버리셨나 봐요.”
그녀는 몰랐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괜히 내가 오버띵킹하는 걸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정말 바쁘셨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약속을 잡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집에 와서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남편도 내게 정말 실수였을 거라며, 그리고 그러길 바란다며 곧 그녀가 다시 약속을 잡는지 안 잡는지를 보자고 했었다. 역시나 그녀는 그 후로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나의 상사로부터 모든 상황을 업데이트받고 있었고 의도적으로 나와의 면담을 모른 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놓고서 상황을 몰랐다니.. 결국 방치하고, 묵인했으면서 말이다.
너무 진이 빠져서 더 이상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나는 병원에 가서 스트레스 진단서 2주를 받아 회사에 제출하고 퇴사하는 마지막 전 날까지는 출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안될 것 같았다. 부당해고에 맞서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액션이었다.) 그리고 그날 하루종일 동료들에게 연락이 왔다. 결국 퇴사를 하기로 한 거냐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다들 내가 오퍼를 거절해서 떠나기로 한 줄 알았다고 했다.
당장 법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지만 여전히 함께 일하는 동료에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이틀 동안 일을 했다. 내가 맡았던 것들을 모두 전달해 주고 마무리를 해주었다. 동료는 사실 당장 고소하고 회사에 엿을 먹여야 할 판에 그래도 잘 마무리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금요일 오전에 전 세계에 있는 협업했던 모든 분들께 감사했다는 인사를 한분씩 하고 개인 연락처와 링크드인을 서로 공유하고 또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오후 2시 영원히 회사 노트북을 닫아버렸다.
그리고선 첫날부터 나를 참 아껴주고 좋아해 주던 타 팀 상사이자 시니어 동료의 집에 초대받아 가게 되었다. 일단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 축하한다고 나를 꼭 안아주셨다. 내가 사 온 케이크와 함께 따뜻한 한 차 한잔을 주셨다.
티타임을 시작으로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손수 밥을 해도 해주셨다. 남편분도 퇴근을 하고 집에 오셔서 함께 이야기를 했다. 다른 덴마크 회사에서 법무팀 사내 변호사로 근무 중인 남편분은 내게 이 모든 일들은 고소해도 될 일이라면서 도움이 필요하면 알려달라고 하셨고 얼마나 속상하고 억울했겠냐며 나를 토닥여주셨다.
그리고 비단 나의 팀 문제만은 아닌 거 같다며, 이건 매니지먼트가 썩어 문 들어가는 게 확실하다며 말씀해 주시길 현 나의 직장이 덴마크 내에서 평판이 안 좋다며 업계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고 하셨다. 매주 한 두 명씩 사람들이 해고를 당하는 것을 보았던 입사 초반, 그때 나간 모든 사람들이 불합리하게 퇴사를 한 케이스이며 CEO가 바뀌면서 거의 ‘독재’ 경영 시스템으로 바뀌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했다. (참고로 동종 업계에 근무하고 계신 분이라 더더욱이 소식이 빠르다.)그래서 조금이라도 회사에 입바른 소리를 하거나 상급 매니저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해고를 당했고, 그중 한 명도 오늘 나를 초대해 준 시니어 상사의 상사였다고 한다.
원래 HR에 오래 근무했던 그녀는 CEO에게 불평이 아닌 건의를 했는데 이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떠나라고 5년을 근무해 온 그녀는 결국 해고를 당한 케이스였다. 그래서 그 이후로 모두들 입을 닫고 그냥 조용히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할 뿐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래서 나의 시니어 동료도 더 이상 이런 불합리한 곳에 더 이상 근무하고 싶지 않아 이번 여름에 퇴사를 하고 스위스로 이민을 가기로 했다고 한다.
오후 2시 반에 갔던 동료의 집에서 밤 10시가 되도록 함께 수다를 떨고 위로받았던 시간. 고맙게도 그녀는 그 어떤 일이던 도와주고 싶다며 나를 오랫동안 꼭 안아주었고 절대 내 잘못이 아니라며 내가 부족한 게 아니라고 해주었다. 그저 운이 시기가 안 좋았을 뿐이라며, 인생에 있는 좋은 경험일 뿐이라며. 인생은 행복만 하기에도 너무 짧다고. 꼭 행복하라고. 고작 마흔 넘은 언니가 해주는 말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의 위로에 위안이 되었고, 동시에 그래도 그럼에도 나는 나를 돌아봤다. 아무리 운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분명 내가 더 잘했을 수 있는 일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언행, 태도, 마음가짐 혹은 상황을 처리하는 방법 등등.
홀로 많은 생각 해보니 여전히 이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이 몇 천명이나 있고 누군가에겐 여전히 최고의 회사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는 그래도 생활유지를 위해 혹은 업계 1등인 이곳에서 커리어를 쌓기 위해 불합리한 모든 것을 감수하고 있을 것이며, 기회로 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이 모든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함께 퇴사를 하는 동료들 이외에 여전히 이 회사에 근무 중인 동료들은 각각의 이유로 아직 퇴사를 혹은 이직을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일어날 때 나도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더 대처를 빠르게 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애초 처음부터 Red flag가 보였을 때 입사 취소를 했을 수도 있고 회사가, 상사가 이상하다고 느껴졌을 때 더 빨리 퇴사를 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혹은 정치판을 잘 읽어서 나를 보호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들. 후회가 아니라 그래도 나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앞으로 내 인생에 있을 직장 혹은 사회생활, 인간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이미 벌어지고 끝나가는 일, 닫히고 다친 마음을 보살피고 다시 일어나기로 했다. 제발 회사를 고소하는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3월이 얼른 끝나길 바란다
어쨌든, 다 괜찮다.
인생에 좋은 경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