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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Choi 메덴코 Dec 05. 2023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와 함께 울어준 덴마크인

새벽 1시가 지난밤, 홀로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버스 정류장 앞에 도착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유난히 길었던 하루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건 이제 매서운 바람을 피해 빨리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과 헐어버린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말이다. 오늘따라 버스가 오지 않았다. 설상가상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그저 서럽게만 느껴졌다. 온몸에 힘이 빠져 결국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억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집에 가서 울려고 꾹꾹 참았는데 비가 내려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다. 어차피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누군가가 나를 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미 터져버린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꺼이꺼이 울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다가와 나를 안아주며 함께 흐느끼기 시작했다.


평소의 나 같으면 자지러지게 놀라 눈물을 그치고 일어났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 상태로 누군가에게 안겨 펑펑 울었다. 한참을 울고 고개를 들었다. 난생처음 보는 여자가 나와 함께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보며 함께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한 파란색 눈동자에 고인 눈방울,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왠지 더 서글퍼졌다. 우리는 서로를 잠시 바라보다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흐느꼈다. 오랜 시간 그녀는 내가 진정될 때까지 함께 울어주었다. 내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마자 그녀는 내게 괜찮은지 물었다. 그리곤 나를 다독여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자정이 넘도록 집에 가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인종차별과 직장 내 괴롭힘 때문이었다. 나는 2015년 덴마크에 워킹홀리데이를 왔다. 정말 맨땅에 헤딩하듯 온 이곳에서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뼈가 시리도록 추운 겨울, 홀로 이력서 200장을 돌렸다. 그러다 운 좋게 한 레스토랑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곳엔 나 빼고. 대부분 동유럽 국가에서 온 백인들이었다.


첫날부터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내가 질문을 해도 그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곳에 아시아인이 근무하는 건 처음이라는 말부터 시작해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텃세’이자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해외 생활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동안 인종차별을 많이 당해봤으니, 어느 정도 맷집이 생겼을 거로 생각했다. 이쯤이야 그냥 참고 견디면 된다는 마음으로 일터에 나갔다. 잘 지내보고 싶어 손 편지를 써서 주기도 했다. 하지만 동료들은 날이 갈수록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나만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는 힘들게 얻은 첫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아 참고 또 참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갑자기 모두가 나보다 먼저 퇴근을 했다. 평소라면 둘이 해야 하는 마감을 나 홀로 하게 된 것이다. 텅텅 빈 넓은 레스토랑을 닦고 쓸었다. 보통 오후 11시 전에 끝나는데 홀로 모든 것을 다 하려니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청소를 다 하고 집에 가려고 열쇠를 찾았다. 그런데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열쇠가 없었다. 레스토랑 내부 이곳저곳 다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동료들 모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 누구도 받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군가 키를 일부러 숨겨뒀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주방 매니저에게 연락했다. 40분쯤 지났을까? 그가 도착하자마자 내게 이렇게 말했다.


"본인이 괴롭힘당하는 거 알고 있죠굳센 척하는 건지정말 모르는 건지 몰라서요너무 힘들 것 같네요미안해요내가 도움이 안 돼서."


그제야 누군가 고의로 열쇠를 숨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알고 있었는데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모른 척했던 건 아닐까 싶다. 그런 상황에 홀로 비를 맞으며 울고 있던 차, 누군가가 나를 안아준 것이었다.


이름 모를 그녀는 내게 어디가 아픈지, 어디를 다쳤는지 물었다. 마음씨 착한 그녀는 자기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내게 물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혹시 집이 그리워서 그래요?”


그녀는 혹시 내가 향수병으로 울고 있는 건지 물었다. 본인은 덴마크 사람이지만, 코펜하겐 출신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집이 그립고 외롭고 힘들 때가 많다고 했다. 이 나라 사람인 본인도 힘들 때가 있는데, 외국인인 나는 얼마나 더 힘들겠냐고 토닥여주었다.


그녀의 말에 설움이 북받쳤다. 또다시 숨이 찬 채로 울며 말했다.


일터에서 괴롭힘을 당했어요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내게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선 또다시 나와 함께 울어주었다.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포옹과 체온이 참으로 따뜻했다.


한참 후, 버스가 도착했다. 그녀는 나와 같은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도 계속 나를 토닥여주며,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내가 괜찮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혹시 지금 갈 곳이 없거나, 혼자 있기 싫으면 본인에 집에 와도 된다고 했다. 그녀 덕분에 많이 진정된 나는 연신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괜찮다고, 혼자 집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 울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이 마치 꿈만 같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위로해 주고 떠난 느낌이었다. 경황이 없어 그녀의 이름을 묻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가 밀려왔다. 심지어 우느라 정신이 팔려 그녀의 얼굴도 기억 나지 않았다. 그저 금발에 아주 아름다운 파란 눈을 가졌다는 것만 기억이 날 뿐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다시 한번 전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먼 타지에서 홀로 어려움을 겪던 내 옆에 엄마가 없으니, 신이 잠시 천사를 내려보내신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날 밤 그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이후 어떤 선택을 했을까? 덴마크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며 모든 걸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을까?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혼자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다 집에 갔을까? 이제 10년이 흘렀다. 그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리고 여전히 그때를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래서 종종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녀를 그리워한다.


가끔 그 버스 정류장을 지나갈 때가 있다. 그때마다 괜스레 마음이 아려온다. 그저 힘들었던 시절 때문이 아니라, 이름 모를 누군가의 위로를 받던 그 장면이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매번 마음이 따뜻해지고 감사함을 느낀다. 살면서 한 번쯤 우연히라도 다시 마주치고 싶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을 안다. 그래도 고마웠다고, 여태 잊지 않았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살면서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꼭 전하고 싶다. 덕분에 용기를 얻고 힘든 시간을 이겨냈다고 말이다. 나도 누군가의 힘든 하루를 다독일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덴마크에서 만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바로 이름도, 성도, 심지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덴마크인이었다.


그녀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준 천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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