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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Choi 메덴코 Jan 11. 2024

덴마크 숲 속 빙판길 위를 걷다 깨우친 것들

일상에서 얻은 인생의 교훈

연말부터 새해 초 내내 라트비아와 덴마크 두 나라에서 계속 가족, 친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 오늘은 또다시 해가 쨍쨍하게 떠서 광합성을 할 겸 홀로 나가고 싶었다.


평상시 자주 걷는 집 근처 초원이자 숲 속에 운동 겸 생각을 정리하러 가기로 했다. 그냥 왠지 오늘 아침 따라 그곳에 가고 싶었다.  얼마 전 사둔 겨울 부츠 대신 걷기 좋은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눈이 다 치워진 안전하고 걷기 편한 도로를 지나 초원 입구로 올라갔다. 예상과 달리 입구는 그곳은 여전히 꽤나 미끄러운 빙판길이었다. 초반은 오르막길인데 가다 보면 이미 다 눈이 녹았거나 치워져 있을 거라 생각하고 올라갔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 달리 폭설로 인해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 거리를 걷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눈은 치워져있지 않았고 쨍쨍하게 비추는 해로 인해 빙판길은 더 미끄럽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가다 보면 아스팔트 자전거 도로 위에는 소금이 뿌려져 있을 거라 생각하고 걸어갔다. 그런데 그 도로마저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을 인지했다. 나는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겁이 많은 나는 눈을 무서워한다. 눈이 내리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먼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길에서 넘어지면 어쩌나 걱정할 정도로 두려움이 많다.


설상가상 작년 첫눈이 온 날, 자전거를 타고 헬스장을 가다 빙판길에 넘어져 무릎에 멍이 들고 놀란 이후로 겨울 내내 자전거를 타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 내가 그토록 무서워하는 빙판길을 홀로 걷게 되었다. 그것도 상대적으로 덜 미끄러운 겨울 부츠가 아닌 러닝화를 신고서 말이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갈지 말지를. 문제는 내가 걸어왔던 초반부 길이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이었다는 것이다. 즉 내려갈 때는 내리막길이 돼서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일단 중간에 나오는 길로 빠지기로 하고 계속 걷기로 했다. 평상시에 가던 길인데도 불구하고 눈 때문에 조금만 경사가 져도 미끄러워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것 같아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걷다 보니 옆에 발자국이 보였다. 아스팔트 옆 잔디 위 눈은 여전히 녹지 않았고 미끄럽지 않아 그 위로 사람들이 밟고 내려간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그 발걸음을 따라 걸었다. 그러고 또다시 걷는데 길이 미끄러워 그 많던 자전거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천천히 걸었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뛰다시피 했을 그 도로를 한 발자국씩 조심스레 걷는데 눈물이 났다.


"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 거야. 나는 왜 바보처럼 또 이런 실수를 한 거야."


겁쟁이인 나는 어디에 도움이라도 요청하고 싶었다. 마침 재택근무 중인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SOS를 청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일, 내가 실수한 거 어쨌든 마무리도 내가 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단 이 악물고 걷기 시작했다. 또다시 약간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보였다. 저곳에서 지나가다 넘어지면 어떡하지? 겁이 났지만 꿋꿋이 걸었다.


그런데 막상 그 앞에 도착하니 멀리서 보고 걱정한 것과 달리 그렇게 경사가 진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강렬한 햇빛으로 인해 이미 도로가 녹아 훨씬 더 안전하게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계속 길을 가다 이번에도 길이 너무 미끄러울 땐 사람들의 발자취가 있는, 눈이 녹지 않은 잔디 위를 걸었다.


지름길이 나왔다. 저 길로 빠지면 집에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또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이왕 가는 거 끝까지 가보자라는 생각으로 두 번의 지름길을 포기하고 원래 가려던 코스를 걸어 집으로 가기로 했다. 결국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이번에는 길을 걷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한 여자가 빙판길 위를 뛰고 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무서워서 겁을 먹었는데, 저 여자는 저렇게 빙판길 위를 뛴다니.. 내가 너무 바보 같아."


덴마크에서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러닝을 하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왠지 내 뒤에서 뛰어 훨씬 더 빨리 앞질러 가는 여자의 모습에 속상했다. 한편으로는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또 나도 저렇게 뛰어볼까? 나도 빙판길 위에서 뛰어도 무섭지 않은 날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나의 속도에 맞춰 걸으며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느라 원래 하려고 했던 생각 정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살펴보고 여유를 가졌다.


"숲 속 깊게 들어가는 길은 아직 눈이 하나도 녹지 않았네. 아 저쪽 길은 여름이 참 예쁜데. 해가 뜨니까 참 좋다."


혼자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기다 또다시 길이 너무 미끄러울 땐 눈이 소복이 쌓인 잔디 위를 걷고, 조심조심 빙판길을 걸어 결국 코스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코스의 끝부분에 도착하니 빙판길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작지만 무언가를 해낸 느낌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길고 기나긴 빙판길이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방금 지나온 길이 '인생'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때때로 혹은 수없이 의도치 않게 잘못된 선택을 한다. 더 잘 되기 위해, 좋을걸 기대하고 한 일이 실수이자 실패로 끝이 날 때가 많다. 하지만 그 또한 나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고 앞으로 전진할 수도 있었다. 선택과 결과는 오직 나의 몫이었다. 다시 돌아가면 넘어져 다칠 수도 있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면 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두려움과 설렘이 이와 같다.


결국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또 그 선택 또한 실수였다. 앞으로 가도 길은 여전히 미끄러웠다. 그런데 마침 누군가 남겨놓은 발자취를 보게 되었고 그 발자취를 따라가니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내리막길을 피할 수 있었다. 이건 마치 이 길을 가본, 경험해 본 인생 선배들의 조언 같았다.


그리고 저 멀리서 보이던 미리 앞서 걱정하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생각보다 안전했다는 점은 마치 다가올 미래에 대해 너무 겁먹는 나의 모습 같았다. 막상 가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가보지 않았더라면 계속 저 멀리서 저기는 미끄러워서 분명 넘어질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뒤에서 뛰어와 나보다 훨씬 빨리 길을 지나간 러닝 하던 여자는 나만의 속도에 맞춰가도 괜찮다는 교훈을 주었다. 꼭 똑같이 저 사람과 같은 속도로 뛰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 상황에 숙련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빙판길을 뛰어갔더라면 나는 넘어졌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길을 갔다. 나는 나의 길을 갔을 뿐이다. 내가 더 노력해서 언젠가 그 빙판길 위에서도 자유롭게 러닝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지금 내게 필요하거나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내가 바닥만 보고 걷다 고개를 들어 긴장을 풀고 주변을 살펴본 건 마치 지금의 나의 상황과 비슷하게만 느껴졌다. 겁이 나서 바닥과 앞만 보던 내가 잠시 멈춰 주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느끼고 관찰하는 것 같았다. 두번의 지름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도 마치 내 성격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미련하게 혹은 우둔하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스가 끝나갈 무렵 얼음이 다 녹은 길에서 뿌듯함을 느꼈다.


결국 해냈구나. 비록 느린 속도로 걷다 보니 평상시보다 20분이나 늦게 도착했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것을 해냈구나.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지만 무사히 다치지 않고 집에 도착했다. 앞으로 이렇게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린 후 당분간은 초원 근처에 가면 안 되겠구나를 경험을 통해 배웠다. 혹은 다음번에는 조금 덜 지레 겁먹고 걸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막상 집에 와서 시간을 보니 생각보다 많이 지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빙판길에서는 느릿느릿했을지라도 눈이 녹은 거리에서는 평상시보다 더 빨리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깨달은 게 있다면 지금 당장 미끄러운 빙판 위에서 한참 뒤에 있을지라도 결국 내가 편안하고 나와 맞는 길 위에 가면 훨씬 더 빠른 속도를 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촉박하게 빨리 걸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후 약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급한 일도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빙판 위를 즐기며 사색에 잠겨도 됐다. 그 걸어온 길의 과정 속에서 더 충분히 즐겨도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원래 가던 초원을 걸었을 뿐인데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혼자만의 시간이 왜 중요한지 더욱이 잘 알게 되었다. 내게 장점이 있다면 사색을 하면서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자아성찰을 하며 반성하고 또 교훈을 얻는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내가 한 실수는 결코 실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다시 내가 생활 속에서 얻은 교훈 중 하나였다.


앞으로도 계속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하겠다만 결국 교훈이라는 게 남는다는 것을 안다. 또 다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건 경험을 통해서다. 때때로 이미 경험해 본 인생 선배들의 충고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빙판길에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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