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멜랑콜리아'를 보고 떠오른 사랑하는 작품들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땐 전혀 '재난영화'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제서야 아, 이 영화가 재난영화구나, 라는 걸 인식하게 됐다.
그도 그럴게, 영화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고,
지금까지 재난영화라고 생각한 <딥 임팩트>나 <아마겟돈>, <해운대>, <2012>같은 블록버스터급 재난영화들과는 달리 영화가 전반적으로 너무나 고요한 정적을 띄어서여일지도 모른다.
모든 재난영화가 그렇듯이, 종말/혹은 대재앙이 다가오는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며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그 재앙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의 군상이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이미지화할것인가로 영화가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프롤로그에서 영화의 모든 내용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보여지는 프롤로그다. 화면이 구리다면 알아서 찾아 보도록 하자.
마치 스틸컷처럼 느껴지는 느린 화면 안에 영화 내용을 압축하는 화면이 짧은 영상 속에 모두 들어있다.
그리고 영화 전체에 흐르는 바그너의 선율이 마치 협연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절정에 이르듯 포스테시모로 향하는 선율과 함께 행성과 지구가 빛을 흩뿌리며 충돌한다.
그 광경은 어마어마한 전율을 선사하지도, 무섭도록 소름끼치는 광경은 아니었지만,
입울 다물게 하는 정적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광경이 마치고 난 후 새까만 화면에 떠오르는
<제 1장, 저스틴>은 드디어 이야기가 시작됨을 선사한다.
저스틴은 아름다운 신부이고, 최고급 결혼 회사에서 주최하는 결혼식을 만끽하고자 했던 아름다운 신부이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은 시작부터 삐끄덕댔다.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등장하는 꼬부랑 길에 들어선 최고급 리무진처럼,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등장한 그 최고급 차가 결국에는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다가 결국 신랑과 신부를 내쳐버린다.
저스틴은 신고 있던 구두도 벗어던진 채 그 길을 걸어 올라간다.
이 영화는 가장 처음 장면부터 이 결혼이 삐꺽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행복해보이는 결혼식이 시작되고, 웃음소리만이 만발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불화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가장 눈에 띄는 첫 불화는 저스틴의 어머니가 자신은 연설을 하지 않을 것이며,
저스틴의 아버지가 연설을 하고 있던 와중에 딴지를 거는 장면이다.
해맑게 웃고 있던 저스틴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결국엔 식장을 벗어난다.
그리고 다시 흐르는 바그너의 선율은, 그녀의 상태를 암시하기도 하면서 이 불화가 계속해서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감독이 스포를 하며 시작한 이 결혼은, 결국 파국을 맞으며 끝이 난다.
신부는 신랑에게 작별을 고하고, 신부는 그 날 처음 만난 남자와 섹스를 하며, 아버지는 그녀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고 떠나버렸다. 이 어찌 끔찍한 상황일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감독은 이 끔찍한 상황을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해, 그 와중에도 덧없는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사랑해마지않는 밀레이의 오필리어, 1852
영화의 포스터를 보자마자 떠오른 작품이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영화 중간에도 오필리어가 나오기도 했고 말이지.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오필리어는 내가 생각했을 때 햄릿에서의 가장 비극적이고 비참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더욱 사랑하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말이지.
이 영화에서 오필리어는 저스틴이다.
그녀는 프롤로그에서처럼 기다란 넝쿨을 질질 끌면서, 자신의 힘으로 헤쳐나가려보이려는 듯 결혼을 꾸역꾸역 해 나간다.
하지만 결코 그 과정이 그녀에게 만족스럽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가장 만족스러웠던 행위는 물이 흐르는 계곡 옆에 몸을 뉘어 맨몸으로 멜랑꼴리아를 바라보는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아마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멜랑꼴리아와 하나 되는,
아아 그래 삶 이전으로 돌아가는 회귀의 경험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마치 오필리어가 미쳐버려(내가 보기엔 그녀가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 것이 아닌가 여긴다, 마치 저스틴처럼) 스스로 생의 마침표를 끊어버린 것처럼, 저스틴 또한 저 멜랑꼴리아가 자신의 마지막을 장식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온몸으로 그 행성을 만끽한 것이 아니었을까.
진정한 천재,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 1565
2부의 제목은 <클레어>, 즉 저스틴의 언니이다.
이 영화는 아주 단순무식하게 생각하면 결혼이 파국으로 내딛는 내용과 행성과 지구가 충돌해 인류의 종말의 그린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단순무식하긴 하구나. 맞는 얘기긴 하지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흠흠, 어쨌든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그 시대에 태어나 네덜란드 풍경화로서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희대의 천재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 과
프롤로그에 등장한 아들 레오를 끌어안고 눈 같은 풀 숲을 헤쳐가는 클레어의 모습을 이 작품에서 차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네덜란드 겨울의 풍경(전문가들은 1월로 추측한다, 이 작품이 초호화 달력의 삽화라니 말이지), 혹은 풍광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감독이 이 작품을 죽음의 상징으로서 끌어왔다는 것이었다.
http://thefineartdiner.blogspot.kr/2012/04/dance-of-death-art-melancholia.html
여기에 다른 작품에 대한 해설도 포함되어 있다. 심심하면 가 보시라. 잼따
브뤼겔의 작품에서 사냥꾼들은 빈 손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사냥개들 또한 빈 손으로 돌아온 죄책감(ㅋㅋ) 때문인지 꼬리를 축 내리고 고개를 숙인 채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다.
겨울이 된 네덜란드에 먹을 고기가 없다는 것은, 굶어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불어 마치 얼음 호수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즐거운 모습도 언제까지나 즐거운 형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호수는 일종의 생명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확히는 물,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얼어있다는 것은 생명이 얼어버렸다는 것, 즉 죽음을 암시하며 나무 위를 유유히 수놓고 있는 까마귀는 적나라한 죽음을 암시한다.
나는 이 작품을 보았을 때, 클레어가 자신의 아들 레오를 끌어안고 어딘지 모를 '살 수도 있는 공간'이라는 무의미한 곳을 찾아 허우적대는 형상이
이 작품의 사냥꾼과 저 얼음 호수 위에 있는 사람의 형상이 아닌가 싶었다.
곧 행성이 지구에 충돌해 지구 상의 모든 생물이, 혹은 지구가 멸종의 위기를 맞는 그 순간에도
살아남기 위해 눈 속을 헤메이는 그들의 절망감과 안타까움처럼, 클레어 또한 그 절망감을 껴안고
종말/죽음을 피하려 발버둥치지만, 그 것을 피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아마 바로크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10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아닌가? 그래, 그냥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ㅋㅋㅋㅋ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듯, 저 목이 처참하게 잘려저나가 피를 흘리고 있는 골리앗의 얼굴이 카라바조 본인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이라는 해석이 대표적이다.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며, 자신의 광폭한 성형을 감추지 못해 세간의 이목과 질타를 한번에 받아야만 했던 천재이지만 미치광이로 살았던 카라바조.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골리앗의 참혹한 형상이지만,
그 골리앗의 머리를 자른 뒤 승리의 기쁨에 찬 다윗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다윗 또한 살인을 했다는 자신의 죄책감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골리앗의 머리를 잡고 있다.
그 얼굴이 골리앗에 대한 경멸을 담았다기보다, 안타까움, 혹은 동정을 담은 것만 것도 같다.
재밌는 사실은, 이 다윗의 얼굴 또한 카라바조의 젊은 시절의 자화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해석을 따르자면, 카라바조는 자신이 자신을 살해하는 일종의 자살/혹은 타살을 그림으로서 표현한 것인데,
이 영화에서 잠깐이지만 등장한 카라바조의 이 작품은, 저스틴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저스틴은 태양 뒤에 감추어져 있었던 행성, 멜랑꼴리아에 자신을 투영하며 동일시한다.
마치 자신에게로 돌진해 하나가 되려는 듯, 온 힘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또 하나의 남편/혹은 자기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하지만 결국 그 멜랑꼴리아는 자신을 죽일 것이며,
그 의식적 살해/혹은 의도하지 않았던 충동적 참혹한 결과이든간에,
누군가 죽고, 또 그 자리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저스틴은 알고있다.
하지만 카라바조와 저스틴이 조금은 다른 것은,
저스틴이 단순히 그 죽음/회귀를 죄책감과 아픔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당연스럽게, 아니 환희에 가득차 받아들이고 있다.
오히려 그 죽음을 회피하고자 발버둥을 치는 것은 정신적으로 정상에 가까운 클레어 쪽이었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사실 요새 퍽 멜랑꼴리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도, 일도, 의도한 대로 풀리지 않고, 게다가 얼마 전 사건마저 빵.. 터져버렸으니.
우울한 기분이 점점 중첩되다가 어제 쾅.. 하고 맞닥뜨려버린 탓이었다.
덕분에 영화를 보고 계속해서 바그너의 선율과 그 장면들이 머리를 떠나질 않는다.
영화를 본 뒤 한시 반 경에 잠에 든 이후로 계속 잠에서 깨다, 다시 자다를 반복하다 결국 새벽에 눈을 뜨고 멍하니 바그너를 듣고 말았다.
원래 바그너는 잘 듣지 않는 편인데도 말이지. 아, 그리고 정말이지 이 영화 엔딩.. 진짜 최고였어.. 이동진 평론가가 30년은 잊지 못할 엔딩 장면이라고 한 것에 일정부분 동의한다. 여기서 '일정부분'이란 30년까진 아니겠다 싶어서지만ㅋㅋㅋ
정말이지, 보고나면 멜랑꼴리함을 선사해주는 영화다. 아 지미, 기분도 거지같은데 그냥 멜랑꼴리아나보자! 했는데 더 멜랑꼴리해져버린...ㅋㅋㅋㅋㅋㅋ 그런영화...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울한 사람에게는 권하지 않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끔.. 아니,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물이 꽉 들어찬 욕조에 들어가 더운 김이 식을 때까지 그 안에 있으면서 멍.. 하니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그런 상상.
아마 그 상상 중에는 내가 그 안에 처박혀 꼬로록 사라지는 상상도 있을 수도 있고,
내가 급 초능력이 생겨서 그 물을 전부 날려버리는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런 날이 온다면 정상적인 상상을 하진 않을 것 같아 무기한 연기 중에 있다.
아, 어제 영화를 보고 욕조 안에 들어있을 때 바그너를 들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고 말이지.
(집에 욕조는 없지만)
내가 만약 저런 상황에 닥친다면 어떠할까. 나도 클레어처럼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칠까.
아니, 아마 나 또한 저스틴처럼 사방이 뻥 뚫린 곳에 들어앉아 그 순간을 고요히 기다릴 것 같다.
내가 비록 저스틴처럼 맨몸으로 그 행성을 받아들이진 못하더라도, 아마 속으로 계속해서 기원할 것만 같다.
어서와, 빨리와, 내게로 와, 기다리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