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테일러 우드, Sigh, 2008
방 안을 들어서면 클래식 같은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커다란 화면 8개가 네모난 방을 동그랗게 둘러싸 나를 중심으로 영상이 펼쳐진다. 들어가서 가장 먼저 보이는 정면의 화면에서 몇몇의 사내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로 손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평상복을 입고 허름한 창고 같은 곳에서 의자 달랑 두어 개 정도 놓고 앉아서 혹은 서서 정면을 주시한 채 손을 놀리고 있다. 오른쪽으로 가자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방금 전의 화면과 같은 공간에서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짚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한 방향을 보면서 입술과 볼에 힘을 준 채 힘껏 숨을 불어 쉬고 있다. 이들 중 이 행위를 하지 않는 몇몇은 무언가를 잡고 있는 손을 한 채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더 오른쪽으로 가니 이번엔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어느 한 곳을 주시하며 입을 오므린 채 숨을 불어 쉬고 있다. 양 손은 어깨 정도로 올려서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짚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진지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계속 바라보며 한쪽 팔을 움직이고 다른 한 쪽 손가락을 쉼 없이 떨고 있다. 그리고 내가 들어온 문 쪽, 그러니까 들어가서 맨 처음 본 화면의 건너편에는 한 대머리 아저씨가 양 팔을 크게 휘두르며 좌우를 두리번거린다. 지금까지 본 사람들은 전부 한 방향만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는데 이 아저씨는 이곳저곳을 다 보고 있다. 이제 다시 오른쪽으로 가보면 한쪽 손을 어깨 정도에 올리고 다른 한 손을 계속 휘둘러대는 한 무리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도 비슷한 자세의 네 명이 보이고, 또 그 오른쪽에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들도 한 곳을 끊임없이 주시한 채 한쪽 손을 섬세하게 움직이고 다른 한 손은 일심동체로 휘둘러지고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어깨 부근을 만지기도 하고 손을 올려 허공을 튕기기도 한다.
이 영상들은 따로 따로 나뉘어져 있지만 한 곡의 음악을 각각의 악기 영상과 나누어 보여주는 오케스트라의 영상이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라고 하기에는 가장 이상한 점이 있다. 그건 악기가 없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다리를 벌리고 앉아 팔을 휘두르며 다른 한 쪽 손을 떨고 있는 사람은 첼로를 켜고 있다는 걸 알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깨 정도 높이에 팔을 올린 채 무언가를 짚고 있고 입술을 모아 입김을 부는 사내는 플루트를 불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첼로도 플루트도 없다. 대머리 지휘자 아저씨에게 지휘봉이 없듯이 첼리스트에게 첼로가 없고 플루티스트에게 플루트가 없다.
이 작품은 오케스트라의 연주 영상이지만 이 연주를 위해 꼭 필요한 악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원들은 악기가 있는 것처럼 행위하고 또 이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고 있다. 악기가 없는 연주자들의 모습은 낯설어 보이지만, 보통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볼 때 연주자의 모습을 보기보다 악기를 바라봤기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다른 모습을 보는 듯하다. 즉 악기의 부재로 인해 악기에서 머물던 시선이 연주자의 손끝으로 향하고 또 그 시선은 다시 연주자의 표정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 모습을 통해 연주자가 전달하고자하는 감정이 극대화되어 느껴진다. 그래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이 자신도 모르게 연주자의 행위에 동조하게 된다. 여기서 관객은 자신이 경험했던 악기 연주의 느낌이 와 닿아 마치 연주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이 때문에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팔을 흔들거나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이 공간 안에 함께 있는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된 것이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연주자가 음악을 연주하지 않고 관객과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생활 소음으로 곡이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작품은 매번 전혀 다른 작품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악기는 없지만 음악은 존재한다. 존 케이지처럼 생활소음 음악이 아닌 진짜 연주가 악기 없이 연주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오는 음악은 신비스럽고 한편으로는 위태롭게 들리기도 한다. 주로 단조로 이루어진 이 음악은 무언가 사건이 시작하기 전에 들려오는 위태위태하고 불안한 배경 음악 같기도 하다. 그리고 각 악기의 특성이 보일 수 있도록 영상 밑에 작은 스피커를 통해 각 악기의 파트를 들려준다.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각각 악기 자신의 소리(영상의 소리)가 7개의 영상과 함께 흘러나온다. 하지만 악기의 개성 있는 부분을 음악에 부각시켜서 불협화음 같이 들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온전히 음악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들으면서 영상에 있는 연주자들의 모습을 쫓고 있기 때문에 음악은 영상을 쫓는 통로로 작용한다. 그리고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는 음악은 공간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관객과 오케스트라 사이의 연결점이 되어준다.
작품을 만든 샘 테일러 우드는 yBa의 일원으로서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사진과 비디오 설치, 영화를 넘나들며 작품을 제작하면서 예술성과 대중성 모두를 얻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은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 연관성으로 관객을 작품 한 가운데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현실성과 일상성은 현대인의 정신과 감정적인 변화를 자극하고 사유를 요청하게 한다.
여기서 이 오케스트라는 연회복도, 턱시도도 입고 있지 않다. 이 사람들은 평소에 입는 평상복을 입고 연주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있는 장소 또한 콘서트홀도 아니고 연습실도 아니다. 일상적이다 못해 허름하기까지 한 창고에서 그들은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창고 안엔 먼지가 가득하다. 이들은 그저 연습하러 털레털레 나온 것처럼 옷차림이 가볍다. 그리고 연주하지 않을 때의 모습 또한 긴장돼있기보단 편안하게 쉬고 있다. 마치 옆집 사는 아저씨처럼 일상적이고 친근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 ‘평상시’의 느낌을 깨트리는 단 하나의 존재인 악기의 부재가 이 영상 전체의 부자연스러움과 비일상적인 풍경을 조장하고 있다. 그리고 관객은 이 부자연스러움을 완화시킬 요소를 음악에서 찾게 된다. 이 때문에 관객은 청각(음악)을 통해 악기를 유추하여 시각에 적용해 악기를 만들어내고, 이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움직임으로 들려오는 음악을 유추해낸다. 결국 평상시의, 일상적인 모습을 만들어내기 위해 관객 스스로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연계시키는 것이다. 즉, 영상과 음악을 잇는 것은 관객이고, 이것은 관객의 사고로 인해 지각된 것이지 보이는 것 그대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지각은 우리의 사유를 가능케 하며, 사유는 의식(무의식)적으로 시각과 청각, 혹은 작품과 관객, 또는 환상과 실제의 두 세계를 잇고, 이 두 세계를 상호작용하게끔 만든다. 이처럼 이 작품은 공간 안에서 떠도는 사유들이 작품과 관객의 소통작용을 통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한다. 결국 이 작품을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객이며 관객이 없으면 이 작품은 완성되지도 못한다.
이 작품은 앤 더들리가 작곡한 노래 Opus. Sigh를 BBC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모두 몇 십 년씩 악기를 연주하여 다른 어떤 도구보다 악기와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연주 마임이 그토록 자연스럽고 능청스러웠던 것이다. 여기서 청각이 아닌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들의 세상은 정적이고 고요하다. 악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웅장한 음악이 아니라 오로지 팔을 움직여서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숨을 쉬는 소리, 신발과 바닥이 작게 마찰되는 소리 등의 생활 소음들로만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의 제목 Sigh는 탄식이나 안도로 내뱉는 숨이라기보다 오케스트라의 고요한 공간의 마임적인 ‘숨’의 상태,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숨’의 공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