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곤잘레스 토레스는 1957년 쿠바에서 태어난 미국 이민자로써 제 3세계의 미술을 대변하였으며 성소수자로서도 그룹 머터리얼(1979년 설립된 미국 성소수자 행동주의 그룹. 에이즈 위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결성된 게이 인권 운동 단체 중 하나)과 ACT-UP(1987년 결성된 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의 약자의 단체. 정부의 에이즈 대책 강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시민 단체)에서 활동하는 등 1980년대 에이즈 위기 시대의 대표적인 게이 미술가 중 한명이다. 그가 35살 때 그의 연인 로스 레이콕이 에이즈로 사망한 후 로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제작했다. 로스 레이콕(Ross Laycock, 1959-1991)은 펠릭스의 연인으로 8년의 시간을 함께하지만 에이즈 진단 3년 만인 1991년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레이콕이 세상을 뜨고 삼 주 뒤, 곤잘레즈-토레스는 연인의 분골을 백 장의 노란 봉투에 나눠 담았다. 그게 마지막 유언이었다고 전한다. 상실감을 이기기 위해 고양이 네 마리와 함께 새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병세도 악화됐고, 로스를 그리워하는 작품을 연이어 제작했다.
펠릭스는 사랑의 언어를 개념미술의 어법과 미니멀리즘의 형식으로 말한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소재는 전구, 벽시계, 거울, 사탕, 포스터, 구슬 커튼과 옥외 광고판 등이다. 그는 또 지극히 개인적인 일화들(주로 로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통해, 작품을 전시하고 해석되는 과정에서 관객에게 깊은 성찰을 하게한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Untitled(Perfect Lovers), 1987-1990>는 로스 레이콕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넘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기성품인 평범한 벽걸이 아날로그시계 두 개를 맞붙여 걸어놓은 것이 전부다. 이 두 시계는 정확하게 같은 시간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가가 일부러 시계에 오차를 발생하게 해 두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두 시계의 시간은 달라진다. 즉, 두 시계는 같은 시간에 건전지를 넣어 돌아갔지만 단지 처음 시작을 같이 했을 뿐 멈출 때까지 같은 시간인 것은 아니다. 결국 이 시계는 멈추게 되어있고, 이 작품의 유효기간은 ‘(시계인) 내 생명이 다 할 때까지’이다.
이 작품에서 완전히 똑같은 모습의 시계는 동성인 사람 두 명을 연상케 한다. 또한 디지털시계가 아닌 아날로그시계라는 점에서 디지털이나 과학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순수하고 가장 기본적인 감정인 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이 두 아날로그시계가 오직 단 한 점만을 맞붙어 있다는 모습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은 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즉 이 작품에서 두 시계는 두 사람, 한 연인을 의미한다.
펠릭스는 ‘작품을 만들 때 염두에 두는 제1의 관객이 누구냐’는 질문에 늘 “로스”라고 답했다. ‘Perfect Lovers’라는 부제도 이 쌍둥이 시계에 멜랑콜리한 감정을 투사하는 언어 장치다. 일심동체로 분초를 함께하니, 분명 이 창백한 한 쌍의 시계는 ‘완벽한 연인’으로 호명되기에 적절하지만, 어느 쪽이 먼저 멈출지 알 수 없다.
또한 사탕 연작 <Untitled(Ross), 1991>는 주변 환경에 따라서 작품의 내용도, 의도도 달라진다. 이 작품은 관람자 누구나 사탕을 가져갈 수 있지만, 약 79kg(176파운드)의 무게를 유지하도록 명시된 작품이다. 이는 에이즈로 투병하다 사망한 로스를 기리는 초상으로, 작품의 무게는 에이즈 투병으로 체중이 줄던 로스의 정상체중과 동일하다. 전시의 큐레이터나 관계자는 이 무게를 유지하도록 꾸준히 채워 놓아야하며, 펠릭스는 포장 재료와 내용물, 전체적인 무게만 명시했을 뿐 사탕을 모두 펠릭스가 제작하진 않았다. 큐레이터가 사탕을 직접 주문하고, 제작하여 79kg을 채워 놓는다. 로스가 정상체중이던 건강한 시절을 떠올리며 그가 다시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펠릭스의 바람을 대신하듯이 말이다. 여기서 관객은 사탕(작품)을 가져가는 행위를 통해 작가의 사적인 기억과 사랑의 알레고리에 동참하게 되어 그 사탕을 가져가는 사람, 혹은 먹는 사람까지 펠릭스의 작품(혹은 로스의 일부)이 된다.
이 작품은 미술관이 소장 가능한 동시에 소장 가능하지 않고, 작품이 일정하고 견고한 형태를 띤 것이 아니라 큐레이터에 의해 매번 조금씩 변화하고 또 관리되기 때문에 펠릭스는 작품을 통해 현대미술에 대한 형식적, 혹은 제도적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앞서 말한 형식적인 질문들을 던지지만 무엇보다 로스에 대한 추억, 사랑, 바람, 그리고 죽음(에이즈)을 암시한다. 사탕연작은 관객들에 의해 점점 줄어가는 사탕처럼 로스의 체중 또한 점점 줄어들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죽음—를 암시하여 그 어떤 회화 작품보다도 현실적으로 와 닿는 바니타스를 제공한다.
펠릭스는 사회, 정치적으로 봤을 때 타자(주변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사회 속에서 쿠바 이민자이자 성소수자로써 극단적인 '소수'이자 ‘타자’였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기 위해 탈-식민주의와 퀴어, 그리고 에이즈에 관하여 문제적 소수자의 입장에 서 있었다. 때문에 그는 이성애적이고 서양 중심적이며 식민주의적인 입장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성애적 공간(이성애 중심의 현실)을 게이 주체의 역사를 위한, 서정적이고 애가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내려고 시도했다. 즉, 게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작품을 만듦으로써 일반인의 시각으로 볼 수 없는 현상을 포착했다. 이처럼 그가 설정한 세상과 그가 바라보는 현실, 그리고 현실에 속한 타자들을 바라보며 그는 그 자신의 매개체로 나눔(give)을 택했다.
펠릭스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했다. 우리나라에도 아픔을 나누면 절반이 되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펠릭스는 자신의 아픔, 슬픔, 사랑, 연민 등을 관객과 함께 나누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식민주의적인 take의 발상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는 기쁨, 즉 탈-식민주의적 'give'에 모토를 가지는 것에서 출발한다. 1980-90년대는 자본주의의 팽창과 침략 전쟁, 자원과 이익만을 탈취하기 위한 전쟁 등으로 가득한 시기였다. 사회의 불안정안 모습에서 사람들의 불안감은 증폭되고 더욱 이기적으로 변했다. 이 가운데서 그의 탈-식민주의적인 'give'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뺏기고 빼앗기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주고받는 기쁨과 안정감을 주었다. 그 이유는 그의 나눔(give) 행위가 단지 무언가를 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의 생각과 마음을 보여줌으로 그의 것이 이해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관객이 그의 작품을 가져가는 것과 동시에 생각의 공유로 이어져 작품이 직접적이고 물리적(사탕)으로 관객에게 영향을 끼치게 됐다. 결국 펠릭스는 관객과 직접 소통하게 되고, 그 순간 펠릭스는 관객 앞에 현존한다. 즉, 그의 작품은 최소한의 형태만으로 관객을 작품으로 초대하고, 또 관객에 의해 작품은 더 이상 특정 자리에만 있지 않고 영역을 확장시켜간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나와는 다른 ‘타자’에게 자신을 나눠주며, 그것을 기쁨으로 삼고 계속해서 자신을 주려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현대의 사람들은 무조건 주기보다는 받기를 원한다. give와 take가 분리된 것이 아닌 give&take라는 것이다. 연인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연인에게 사랑을 베풀지만 상대방이 더 많은 사랑을 주지 않으면 실망하고 상실하며 사랑이 아니라고 느낀다. 즉 현대인의 사고방식에서 나눔의 행복은 더 이상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채무 관계처럼 생일선물을 받으면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생일선물을 준 친구의 생일을 걱정해야한다. 감정이 갚아야 하는 빚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펠릭스는 조건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공개하면서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달했다.
물론 펠릭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로맨티스트적인 면과 시적인 운율, 리듬감, 그리고 은유성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또 은유의 해법을 찾아내는 순간, 카타르시스과 함께 ‘나도 그것을 안다’라는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그는 이 공감대 형성으로 인해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비주류의 미술을 주류계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관객의 정신적인 부분만이 아닌 물질적인 현상(사탕)을 창조하여 지속적으로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는 매개체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관객은 그 매개체를 보는 순간 그의 ‘부재’와 그의 ‘추억’, 그리고 ‘사랑’을 떠올리며 이제 다시금 그것이 관객들의 기쁨과 추억이 되었다. 그가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눔을 전하는 일이 다시 관객을 통해 새로운 나눔으로 이어지게 됐다. 펠릭스는 주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탕과 시계라는 소재에 자신의 사랑이라는 내용을 담아 관객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럼으로 관객은 자신의 사랑을 추억하고 펠릭스의 작품을 통해 얻은 사랑과 나눔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나눠준다. 그저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나눠주는 일이 이제 관객을 통해 사랑과 나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주었다.
펠릭스는 자신의 타자성을 감추기는커녕 더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는 것은 그가 소수자로써 투쟁하는 얘기가 아닌 그의 러브 스토리였다. 그의 러브 스토리는 분명히 게이의 연애이고, 또 쿠바 이민자의 이야기지만 사랑이라는 사람의 공통된 감정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관객에게 한층 친숙하게 다가갔고, 더욱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친숙한 작품으로 익숙하지 않고, 오히려 두려운 존재인 ‘소수자’의 상황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졌다. 그로인해 펠릭스는 1980-90년대 에이즈 시대의 미국의 슈퍼 게이 히어로로 등극하여 많은 추종자들과 영향력을 남긴 채 에이즈로 장렬히 전사했다. 하지만 그는 관객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금 추억된다. 그의 시계와 사탕은 단지 소모품에 불과하지만 펠릭스-곤잘레스 토레스라는 인물의 언어를 덧씌움으로써 소통의 매개체와 추억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영화 속의 슈퍼 히어로처럼 악당과 싸우고 때리면서 주위의 물건을 파괴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남기는 것이 아닌 작품으로서 다수의 대중들에게 ‘대화’를 걸었다.
*바이오그래피
1957년 쿠바 과이마로에서 태어난 곤잘레즈-토레스는, 1971년 부모를 떠나 푸에르토리코의 삼촌 곁에서 성장했다. 푸에르토리코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1979년 뉴욕으로 이주해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인테리어디자인을 공부했고, 1983년 졸업식을 치른 뒤 (1986년 동거인이 될) 레이콕을 처음 만났다. 1987년 NYU와 국제사진센터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7년 에이즈 위기의 정치적 함의를 다루는 미술가 집단 ‘그룹 머티리얼’에 참여해 1989년 《에이즈 연보(AIDS Timeline)》를 공동 제작했고, 이후 시대의 유행에서 동떨어진 걸작을 연이어 발표하기 시작했다. ... 사후 10년만인 2007년 제52회 베니스비엔날레의 미국관(커미셔너: 낸시 스펙터, 구겐하임미술관 학예실장)은 그를 대표 작가로 선정해 다소 어색한 개인전을 선뵀고, 2012년 6월 삼성미술관 플라토는 아시아 최초로 그의 회고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1995년 죽음을 예감한 작가는 마지막으로 연보 형태의 자화상 작업인 《무제(Untitled)》를 정리·제작했는데, 옮기면 다음과 같다:
“빨간 카누 1987 수채화 1964 파리 1985 미 연방 대법원 1986 블루 레이크 1986 우리만의 아파트 1976 로사 1977 과이마로 1957 뉴욕시 1979 페블스와 비코 1985 로스 1983 시민권 운동 1964 마리엘 선박 탈출 1980 백색 셔츠 1984 줄리 1987 안락사 1991 CNN 1980 검은 월요일 1987 베를린 장벽 1989 위대한 사회 1964 베니스 1985 와와네사 호수 1987 U.N. 1945 어머니 1986 미리엄 1990 VCR 1978 아빠 1991 피그만 침공 1961 D-데이 1944 인터페론 1989 제프 1978 은빛 대양 1990 수소폭탄 1954 내가 알던 세상이 사라지다 1991 브루노와 매리 1991 마드리드 1971 MTV 1981 라파엘 1992 5월 1968 안드레아 1990 24번가 1993 L.A. 1990 위약 효과 1991 조지 넬슨 시계 1993 기억에 남을 전경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