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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structionist Apr 07. 2019

03. Su

2. 정보를 잘 수집해야 길이 보인다던가

사무실을 나오는 스테판의 발걸음에 사뭇 긴장감이 깃들여있었다. 

사무실을 나오는 내내 다른 사원들과 기자들에게 힘을 내라는 독려를 받고, 

더군다나 비장함까지 느껴지는 국장의 파이팅을 받아서인지 더욱 그러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이번 조사에서 제대로 된 것을 뽑아오지 못한다면

그 결과가 어찌될는지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스테판은 일단은 당장 알아보기 쉬운 곳으로 향하기 위해 

평소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USA 투데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가로 최소 억대가 넘는 어마어마한 정보를 단 며칠의 잠자리로 바꾸어버린 엘은 

자신이 한 짓의 심각성을 생각지도 않은 채, 혹은 무시한 채 콧노래를 부르며 업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Hey 엘, 뭐 좋은 일 생겼어?"

"그럼~ 내가 혹시 내 애인 사진 보여줬었나?"

"오우, 그 Article의 럭키그린 말이지?"


엘은 복사기 앞에서 직장 동료에게 스테판의 일을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론 오늘 자신에게 약속한 일이 아닌 다른 일로도 자랑할 거리는 충분히 넘쳐났기 때문에

엘에게 붙잡힌 직장 동료는 한참동안을 업무에 복귀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애인 자랑에 열을 올리는 동안 실제 자신의 애인은 엘의 사무실로 몰래 숨어들어가는 중이었다.


"스테판! 오랜만이야."

"쉬, 쉬. 큰 소리 내지 말아줘요."

"어, 왜? 싸우기라도 했어?"

"대충 그런거니 쉿, 조용히 해줘요."


스테판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행정 여직원에게 입막음을 약속받으며 앞으로 전진했다. 

엘이 어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연락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업무로 바쁜 것 같아 보였다. 

꽤나 잘생긴 커플이었기에 엘도 스테판도 주변에서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 

스테판은 한참을 입막음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다가 겨우 자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재빠르게 책상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일간지 기자답게 여러 사건소식으로 가득 채워진 종이와 메모지들, 그리고 다른 경쟁사에서 나온 가십거리들이 가득했다.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이 가십거리 중에서 쓸 만한 정보가 있으려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여기저기를 뒤져보던 찰나, 난장판이던 책상 한 구석지에 놓인 까만 수첩을 발견했다. 

두꺼운 가죽으로 된 몰스킨 노트는 꽤 오래되어 보였고, 

무엇보다 이런 노트를 스테판 자신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눈길이 갔다. 

이런 노트라면 엘을 만난 지 꽤 된 스테판 자신 또한도 기억을 했을법한데, 

의도적으로 자신 앞에선 들고 오지 않은 것인가, 라는 생각이 미치자 일단 노트를 집어 들고야 말았다. 

그리고 애인의 잠긴 서랍의 문을 열었다.


서랍 앞에서 손을 깔짝거리며 긴가민가하던 찰나, 

철컥하고 열려진 서랍의 느낌에 쾌재를 부르며 서랍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첫 번째에서는 명찰더미, 그리고 두 번째에선 통장과 도장 등의 개인용품, 

마지막 세 번째에서마저도 결재 서류들이 잔뜩 쌓여진 것을 보고 실망감을 감출수가 없었다. 

결국 한숨을 쉬며 돌아서려다가 문득 스치는 생각에 서랍 밑쪽을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잡히는 서류 봉투의 느낌에 '이거다!'라는 속 외침을 내며 찌직-하고 얇은 테이프 소리로 봉투가 뜯겨져 나왔다.


"스테판! 엘이 돌아오고 있어."

"앗, 고마워요. 조이."


스테판은 빠르게 손을 놀려 서랍을 원상복구 시켰다. 

그리고 제 양복 안쪽에 서류봉투와 수첩을 넣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통로를 따라 화장실 쪽으로 향하다가 

다시 몸을 돌려 엘의 자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곤 마치 오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반갑게 엘을 향해 인사했다.


"나 왔어~"

"스테판! 어쩐 일이야!"


여전히 히죽거리며 웃음을 지우지 못하던 엘이 스테판을 발견하자마자 

제 일거리를 책상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두고 스테판을 향해 달려왔다. 

허리춤을 잡으려고 하는 엘의 자세에 스테판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서 스킨십 하면 아까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할 거야."

"아니 왜! 그건 아까의 계약이었잖아."

"여기선 싫어. 게다가 네 직장이잖아."

"아무도 신경 안 써. 그리고 다들 우리 사이를 알고 있는걸?”


엘은 능글거리는 말투로 다시 한걸음 스테판에게 다가왔고, 

스테판은 자신이 훔친 물건 때문에 더더욱 몸을 빼며 인상을 썼다.


"싫다니까!"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결국 엘은 스테판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반발자국 멀어진 채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아까 밖에서 키스하고 만진 것 때문에 그러려니, 싶은 마음에 한발 져줘야 하려나 하는 마음이었다.


"밖에선 싫다구. 당신은 괜찮을지 몰라도 난 싫어."

"알겠어, 알겠어. 집에서 많이 만져달라는 거지?"

"…헛소리."


엘은 고개를 돌리는 스테판의 귀가 빨개진 것을 보고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가끔 주체할 수가 없어서 바보같이 웃는데도 

이렇게 앞에 있으면 더 얼굴이 헤퍼지는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스테판의 손을 잡고 탕비실로 향했다.


탕비실에서 차를 내리던 여직원이 저돌적으로 들어오는 엘을 보곤 어머, 작게 소리 질렀다. 

그리고 다섯 손가락을 쫙 피며 엘에게 단호하게 ‘Just! 5 minutes.’라고 말하곤 조용히 빠져나갔다. 

Just를 매우 강조하였지만 나가기 직전 ‘좋은 시간 보내!’라고 하여, 

듣는 스테판 얼굴이 터져버릴 듯 새빨갛게 타오르게 만들었다. 


대체 엘은 회사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얼마나 하고 다녔기에 별 사람들이 다 자신의 얼굴을, 

게다가 남자 둘이서 탕비실에 찾아오니 자리를 비워줄 정도란 말인가. 

스테판은 따지듯 엘에게 물어보기도 전에 제 허리를 붙잡아오는 손길을 막기에 급급해져버렸다.


“왜! 아무도 없잖아!”

“너 지금 제정신야? 방금 그 사람은 뭔데!”

“사장님 비서팀 루안. 예쁘지?”

“…너.”

“아냐! 관심도 없어! 난 지금 허니만 보인다구?”


스테판은 괜스레 눈을 흘기며 엘의 정신을 분산시키려 애를 썼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라지만, 정보를 캐기 위해 서랍을 뒤지고, 

서류를 훔치는 연인의 행동을 마냥 귀엽다할 순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엘 또한도―스테판이 다소 폄하하는 일간지이긴 하지만―프로패셔널한 기자였기에 

정보를 훔쳐가는 것에 있어 관대할 리가 없었다. 

결국 이 사실을 들키게 된다면 스테판 자신은 물론이고 article까지도 구설수에 오르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만지지 말고 키스만 해.”

“어떻게 키스를 하는데 만지지 말라는 거야! 말이 된다고 생각해?”

“싫음 말던가.”

“알겠어, 알겠어. 날 보러 와줬으니 그 정돈 들어줄게.”


엘을 보러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하는 입술이 부루퉁하게 솟아올랐다. 

그 모습에 다시 또 흥분을 하며 달려든 것은 당연히 엘 쪽이었다. 

엘은 손을 어찌하지 못하고 스테판을 벽으로 밀어붙여 제 손을 벽에 고정하고 스테판을 제 품안에 가둔 채 격렬하게 키스했다. 

여전히 바깥에서 키스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스테판은 

눈을 멀뚱히 뜬 채 바깥을 살피며 뻣뻣하게 혀를 움직이고 있었다.


엘은 바깥 눈치만 살피고 있는 스테판이 불만스러운 건지 스테판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으며 오물오물 집중하라고 낮게 으르렁댔다. 

스테판도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그 열정에 입 맞추려던 찰나, 

탕비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곰 같은 사내가 들어와 엘을 찾았다.


“엘! 에반스한테서 Su 건 때문에 전화왔……oh, sorry.”


곰 같은 사내는 그 덩치와 맞지 않게 재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그 짧은 등장 사이로 스테판은 엘의 가슴팍을 밀쳤다. 


사내의 등장에 놀라서 꽤 힘이 많이 들어간 스테판의 손속에 엘은 

‘어, 어…!’하며 양손으로 허공을 가르다가 바닥으로 엉덩이를 찧고야 말았다. 

곰 덩치가 들어온 시간은 단 1초도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후폭풍은 꽤나 컸다.


스테판은 빠르게 엉덩이를 찧은 엘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사과라도 할 모양인지, 하지만 사과를 할 얼굴 치고는 그 눈이 형형하게 빛났고, 

콧김이 거세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그가 여실히 흥분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에반스가 누구야. 설마 그 워커 에반스야?”

"잠, 잠깐만, 스테판."

"스테판이라니, 허니? 당황한 거야 허니~?"


스테판은 당황한 엘을 몰아붙였다. 

평소 허니라거나 스윗이라던가 하는 느끼한 애칭으로 부르는 주제에, 

당황하거나 감정이 격해지면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게 되는 엘이었다. 

스테판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엘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달콤한 '허니'와는 많이 다른 뉘양스로 엘을 협박했다.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기세였다.


"워커 에반스가 이걸 알아 온 거야? 어떻게? 왜? 에반스 지금 여기 입사했어?"

"허, 허니… 잠깐만 진정하고…."

"진정? 진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당장 말 안 해?!"


스테판은 엘의 멱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덩치 좋고 몸 좋은 엘은 그런 스테판의 손짓에 속절없이 흔들리며 켁켁거렸다. 

스테판의 괴력이 발휘된 건지 엘이 약한 건지 엘은 속절없이 흔들렸다. 

결국 스테판은 멱살이 잡힌 탓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엘을 팽개치고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엘의 스마트폰을 멋대로 집어 들고 메신저로 에반스의 연락처를 스테판에레 전송했다.


"너, 날 일부러 엿 먹이려고 한 거지 지금?"

"아, 아냐. 진정해 허니 제발."

"필요 없어! 당분간 연락할 생각 하지 마."

"스테판…!!"

"네가 준 사진만 보고 러셀 윈스턴이나 루이 하멜을 쫓아갔다가 단서도 못 찾고, 뒷골목에서 '처리'됐겠네? 안 그래?"

"아냐! 그런 게 아냐…!"

"뭐가 아니긴 아냐! 난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다고! 목숨 줄 내걸고 Su 찾아내려고 한 거였는데, 그 목숨 줄 내놓은 게 내가 아니라 내 애인이었을 줄이야."

"오해야, 스테판. 내 말 좀 들어줘."

"닥쳐! 넌 일부러 내 시야를 편협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그 길로 쫓아가게 만들었지. 아마 그 끝엔 건질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을 거야. 아무 성과도 없는데다가 목숨마저 위협당할 수 있겠지. 틀려?"

"……스테판."

"틀리냐고, 이 개자식아!"


스테판은 일어나 자신을 마주보는 엘의 가슴팍으로 스마트폰을 던졌다. 

묵직한 무게가 엘의 가슴팍을 때리자 억, 하고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젖혔다. 

엘은 억울하다는 듯 연신 볼멘소리로 스테판을 불렀지만, 스테판의 말이 아주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엘의 심정이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따지고 보면 스테판의 말 또한도 일리가 있는 것이었고, 

자신이 제 애인을 사지로 몰았다고 생각이 들자마자 사고가 멈춰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스테판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엘의 가슴팍에 비수를 꽂고야 말았다.


"…내가 연락하기 전까지 연락하지 마."

"스테판…!"


스테판은 몸을 돌려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엘은 그런 스테판의 뒷모습을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텅, 하고 닫히는 문이 스테판의 마음처럼 굳게 닫혔다.



분한 마음에 씩씩거리며 USA 투데이를 나온 스테판은 자신의 메신저로 전송한 에반스의 연락처를 확인했다. 

현재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에반스가 USA 투데이에 입사했을 가능성이 크고, 

에반스가 확보한 Su의 정보를 대서특필한 것으로 보였다. 

만약 스테판이 에반스를 몰랐더라면 단지 USA 투데이 측의 기자일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테판은 과거 워싱턴 포스트에 입사했던 시절 그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워커 에반스는 그 당시에도 꽤 잘나가는 기자였고, 워싱턴 포스트에서 유망기자로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렸다. 

실제 친분은 없지만 듣는 얘기로는 꽤 치밀하고, 지독한 성격이라 한번 물었다 하면 놓질 않는다 하여 

워싱턴 크로커다일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문 기삿감은 반드시 취재한다고 알려진 워커 에반스가 

USA 투데이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심부름꾼같은 기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USA 투데이와의 관계는 뒤로 미뤄 두더라도, 

Su에 대한 정보를 알아낸 것은 워커 에반스일 가능성이 컸고, 그 정보는 스테판에게 꼭 필요한 정보였다.


“개자식.”


스테판은 엘에 대한 욕을 낮게 뇌까리며 숨겨두었던 서류봉투를 꺼내들며 

택시를 잡아 엘과 함께 동거하는 집으로 향했다.


내가 이걸 그냥 넘기나 봐라. 엘소드 이 개자식.


“후….”


스테판은 욕을 하면서도 서류 봉투 안에 있는 내용을 확인했다. 

서류봉투는 계약서로 보이는 종이 몇 장만 들어있었고, 안쪽에는 사진이 들어있었다. 

스테판은 종이에 빽빽이 적힌 내용 서두에 써진 내용을 보고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본 계약의 목적은 “러셀 윈스턴”과 “마커 스티븐”의 “Su의 작품을 전시함”에 있어 관련 정보를 제공하거나 수령해야 하며, 동 정보의 비밀 유지 및 보호를 위해 필요한 제반 사항을 규정함에 있다.’


“마커랑 러셀?!!”


마커 스티븐은 Su의 첫 데뷔를 시켜줬던 작가로 그의 이름을 빌려 Su의 첫 작품은 세상에 알려졌었다. 

당시 영국의 무명작가였던 마커 스티븐은 영국의 젊은 아티스트들과의 그룹전을 통해 출품한 

단 한 점의 작품 때문에 화재를 끌었고, 처음에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구 꺼리다가 어느날부터 

갑자기 Su의 작품을 자신이 제작한 작품인 것 마냥 모든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은 마커가 전시한 Su의 작품이 마커의 작품이라 믿어의심치 않았고, 

새로운 대형 신인의 등장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마커 스티븐의 인터뷰가 언론에 대서특필된지 1달이 채 되지 않아 

러셀 윈스턴의 기자회견을 통해 Su를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마커 스티븐은 어떻게 됐더라…?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스테판은 갑자기 든 의구심에 서류를 집어넣고 핸드폰을 꺼내들어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도착한 택시를 내려 집으로 걸어올라가며 마커 스티븐의 현황을 검색했지만 

러셀의 기자회견 이후 딱히 이렇다할 기사가 나와 있지 않았다.


마커 스티븐이 분명 Su의 작품은 제 작품인 양 사기를 치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미술계에 알려진 인사이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특히 가쉽거리를 좋아하는 몇몇 일간지와 3류 잡지는 

이른바 ‘실패한’ 예술가의 처참해진 몰골을 쫓아다니며 취재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보기 싫어도 마주하기 마련이었다.


스테판은 의구심과 동시에 피어난 불안함이 ‘설마, 설마…’라는 생각을 갖게 했고, 

영국쪽 미술계 사정을 잘 아는 동료 기자에게 전화해 질문을 던졌다.


[스테판, 오랜만이야! 무슨 일이야?]

“혹시 마커 스티븐 소식 알아?”

[마커 스티븐? 아, 그 Su 작가?]

“응, 러셀 기자회견 이후로는 뭐 기사가 따로 없더라구.”


스테판은 통화를 하며 문을 열었고, 텅 빈 방에서는 잉크냄새와 익숙한 향수 냄새가 밀려들어왔다. 

스테판은 문 앞 신발장에 키를 놓고 방 안에 있는 캐리어를 꺼내들었다.


[나도 뭐 들은 건 따로 없었던 것 같은데… 물어봐줄까?]

“알만한 사람 있어?”

[응, 그 때 그룹전 취재했던 기자 중에 마커 스티븐이 속했던 그룹이랑 꽤 친했던 사람이랑 번호를 주고받았어.]

“오! 정확하겠네. 그럼 물어보고 전화 다시 줘~”

[응~]


스테판은 전화를 끊고 호주머니에 전화를 쑤셔넣었다. 

그리고 중요한 문서인 서류와 엘의 책상에서 가져온 몰스킨 노트는 자주 가지고 다니는 갈색 빌포드 가방에 넣고, 옷가지들과 랩탑, 필요한 서류들도 싸기 시작했다.


Ringg… Ringg…


“어~ 금방 전화했네?”

[허니! 어디야?]


짐을 싸느라 정신없던 새에 걸려온 전화를 바로 받아버린 스테판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엘의 목소리에 잊고 있었던 짜증이 다시 몰려왔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빠르게 가라앉으며 입에서 드라이아이스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왜 전화했어?"

[허니, 제발 내가 잘못했어. 만나서 얘기하자. 응?]

"내가 연락하기 전까지 연락하지 말랬지?"

[잠깐……]


스테판은 가차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고, 핸드폰 너머로 엘의 목소리가 닫히지 않은 채 울리듯 끊어졌다. 

스테판은 정신없이 짐을 챙기다보니 내려와있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스테판이 집을 나가고 난 후라면 엘은 제정신이 아닐지 모르지만 

다시 Su에 대한 일을 잡고 시작할 때가 되면 스테판이 제 서랍에서 빼간 두 가지 물건-서류와 몰스킨 노트-를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제 연인이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제 자리를 뒤져 정보를 훔치려했다는 것이 들통나면 

스테판은 지금의 냉랭함을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정말 꼴도 보기 싫은걸.’


스테판은 현재의 일에 충실하자는 생각으로 다시금 짐을 챙겨들었다. 

현재 스테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커리어도 애인인 엘과의 사이에 대한 염려가 아닌, 

자신이 Su의 정체를 밝혀내서 그를 만날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그에 대한 부수적인 것으로 article과 그 외 기타등등의 문제들이 부수적으로 따라오지만 말이다.


Ringg…… Ringg……

다시금 울리는 벨소리에 스테판은 ‘또 걸은거야? 그렇게 내가 전화하지 말라고 했을텐데‘라는 마음이 들었다가도 한편으로는 ‘내가 하지 말라는데도 내 화를 풀어주려고 계속 전화하는건가?’라는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전화의 발신인은 엘이 아닌 기다리던 동료 기자의 전화였다.


“어, 벌써 소식 찾은거야?”

[아니, 찾은 건 아닌데 이상해서 연락했어.]

“이상하다고?”

[응, 러셀 윈스턴의 기자회견 이후로 본 사람이 없대. 아무도.]

“아무도?”


섬찟한 느낌이 목덜미를 스산하게 스쳐갔다. 

의심으로 시작된 우려가 현실이 되었지만, 그 결과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 

아니 짐작되는 하나의 결과가 있지만 그 내용을 입밖으로 내뱉기가 무서워지는 기분에…-


[집에 찾아가봤는데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있고, 작업실에 있던 물품들도 이미 다 빠져있었대. 친인척은 애초에 가까이 하는 사람이 없었고.]

“…너무 부자연스러운데?”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영 찜찜하고 이상해. 아무리 Su를 도용했다고는 해도… 아니다, 혹시 그건가?]

“뭐?”

[사실 마커 스티븐이 Su 본인이라거나?]

“엥?”

[그렇지 않고서야 마커 스티븐이라는 사람 흔적이 이렇게 연기처럼 사라질 이유가 없잖아?]

“아……”

[누군가 그를 죽였다면 굳이 이렇게 마커 스티븐의 모든 흔적을 정리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지워야 할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럼 좀 섬뜩한데.]

“좀 더 알아봐 줄 수 있어?”

[알겠어. 나름 기삿거리는 될 것 같으니 겸사겸사 알아봐줄게.]

“그래, 뭐 숨기거나 하는 것 없이 다 알려주기다.”

[알겠어, 알겠어.]

“연락해.”

[okk.]


영 찝찝한 전화를 마치고 스테판은 다시 짐 챙기기를 시작했지만 

바삐 움직이는 손발과 달리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점점 ‘시실리 보스’라는 누군가가 떠오르면서, 마커 스티븐의 죽음이 자꾸만 앞을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철컥, 촤르륵…


결국 스테판은 옷장 구석에 숨겨놓은 콜트와 탄환을 챙기며 제대로 작동이 되는건지 내심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게 제대로 작동이 되든 되지않든 사용할 일만 없었으면 하다가도 

머릿속으로는 총을 봐줄 사거리 샵의 노트 영감에게 연락해 권총을 봐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스테판은 자신이 만에 하나 이 권총을 사용해야 할 생각이 들었다가도 

막상 그런 상황에 닥쳤을 때 이런거라도 하나 없으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다가도, 

또 다시 워싱턴 포스트에 재직했을 당시 군대에 다녀왔다던 동양인 기자가 했던 

‘총 연습은 암만 해도 익숙해지지 않더라. 이 동네는 무슨 배짱으로 총을 그렇게 사나 몰라’라는 말이 이명처럼 울렸다.


“젠장,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스테판은 제가 마치 햄릿이라도 되는 양 무기를 챙겨들었다. 

그리고 트렁크를 한 손에, 빌포드 가방을 나머지 손에 들고 신발장 구석을 뒤져 겨우 찾아낸 냄새나는 키홀더를 집어들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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