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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훈 Jul 28. 2023

1월 그리고 파타고니아

남미 파타고니아 여행기

이불을 덮어도 어디선가 찬바람이 들어온다. 1월은 겨울의 숙성기. 김장독 배추가 한 포기씩 익어가듯 겨울은 그렇게 깊어만 간다. 1월이 오면 회한(悔恨)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새해 새 아침의 다짐으로 늘 바쁘다. 그러다가 한 해를 어떻게 보낼 지, 어떤 일들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기대감과 약간의 흥분으로 동면(冬眠)에 들어간다.


한강이 얇게 얼어있는 날, 지하철에서 한 승객을 보았다. 그 승객의 점퍼에 용의 문신처럼 꿈틀거리는 ‘Patagonia’라는 글자. 아, 파타고니아! 지구 저편 남미(南美)의 동토(冬土)가 이맘때면 가장 생명력이 왕성한 곳, 살아있음을 너무도 생생히 느끼게 해준 곳, 그리고 소고기 육질 맛에 반하여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그 곳이 눈앞에 선명히 펼쳐졌다.


아르헨티나의 남부지방에 있는 깔라파테(Calafate)시는 모레노(Moreno), 압살라(Upsala)빙하, 엘 찰텐(El Chalten), 피츠로이(Fitz Roy)산으로 유명한 빙하지대와 장엄한 산군(山群)으로 둘러싸여 있는 관광지이다. 지금이 대자연을 가까이 하기에 좋은 시기라서 관광객들로 만원을 이룬다. 그곳의 백미는 남극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빙하의 모습을 보고, 빙하 위를 걸어보는 트레킹 이었다. 모레노 빙하는 약 50~55미터 높이의 빙하가 병풍처럼 옆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전망대에서 보니 우르렁 소리와 함께 빙하의 한 쪽이 깨지며 폭포처럼 물 속으로 떨어지는 장관을 보여 주었다. 온난화 현상으로 예전보다 녹는 속도가 빨라진다고 하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강에는 여기저기 유빙(流氷)이 떠다니고 색깔도 비취색, 회색, 먼지 낀 검푸른 색 등 다양하였다. 회색 빛 하늘에 하얀 빙하, 그리고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강(江)의 뿌연 모습이 태고(太古)의 모습이 아닐까.

웅장한 빙하지대 ©손훈

몇 년 전 여행했던 뉴질랜드의 밀포드 사운드(Milford Sound) 해협을 다시 만난 듯 하였다. 가이드를 따라 말굽 모양의 넓은 아이젠을 끼고 빙하 위를 걸어 보았다, 얼음 입자가 굵어서인지 한국의 겨울 산 눈길에서 걷는 느낌보다 두 배나 힘들었다. 한 시간 가량 갈라진 크래비스(틈)와 얼음구멍을 피해 걷고 나니 다리가 무척 피곤하였다. 종착지에 이르자 가이드가 얼음물을 깨서 위스키를 조금씩 부었다. 금새 온더락(on the rock)이 되었다. 여행객들은 온더락으로 건배하며 잊지 못할 빙하 트레킹의 묘미를 만끽하였다.

모레노빙하 트레킹 ©손훈

깔라파테에서 아르헨티나 최남단 우슈아이아(Ushuaia)로 갔다. 남미의 땅끝마을, 남극의 전초기지 답게 도시가 해변을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었고 바다 바람도 차서 극지방이라는 걸 실감했다. 그런데 버스노조의 파업으로 이틀간 체류 예정이 4일간으로 늘어났다. 이 썰렁한 항구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 지, 숙소도 구하기가 힘들어 난감하게 되었다.


수소문 끝에 한인 민박집을 찾아 겨우 여장을 풀 수 있었다. 오랜만에 고향집에 온 듯 작은 방도 편하게 느껴졌다. 우슈아이아에서 보낸 시간들은 꿈결처럼 감미로웠다. 비글(Beagle)운하 투어에서 본 바다 새, 펭귄, 로보(바다표범)들이 작은 섬에 무리 지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무인도 산책길에서는 예쁜 야생화가 지천이었으며, 깔라파테 꽃과 함께 그 열매가 아이스크림 재료로 쓰임을 여기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운하를 지나면 남극으로 간다고 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깔라파테꽃과 열매(좌) / 바위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바다표범들 ©손훈

저녁마다 근처 슈퍼에서 산 소고기 등심과 돼지 소시지를 구워서 와인과 곁들여 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었다. 소고기 550그램에 68페소 (한화 6,800원)이니 고기의 천국이 아닌가! 배가 불러 밥을 먹을 수 없었고, 게다가 주인이 삶아준 킹크랩 까지 곁들이니 작은 위장이 아쉽기만 하였다. 아름다운 생태환경을 지닌 우슈아이아에는 ‘불의 땅(Tierra del Fuego)’이라는 국립공원을 꼭 가보아야 한다. 위도상 제일 아래 점인 ‘세상의 끝(Fin del Mundo)’ 표지판을 만나고 거기서 모두들 인증사진을 찍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더 아래로 내려가면 남극이다. 세상의 끝은 여기가 아니라 이 멋진 바다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니 쇄빙선을 타고 끝까지 가고 싶다.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수 만리 길을 지나 지구의 끝까지 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공원의 해변길 8킬로를 3시간여 걷다 보면 마치 남해의 바래 길을 연상하게 된다. 아름다운 다도해의 풍광과 모서리를 돌 때마다 달라지는 해변의 모습, 보라색 고구마들, 작은 포구에서의 막걸리 맛, 다랭이 밭… 우슈아이아는 처음에는 새침했으나 볼수록 정감가는 사람처럼 싱그러웠다. 그래서 또 만나고 싶다.

불의 땅 국립공원의 해변길 ©손훈

파타고니아 지방은 아르헨티나와 칠레에 걸쳐 있는데 칠레의 남부에 유명한 또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이 있다. 또레스(Torres)는 탑이란 뜻의 스페인어이고, 빠이네(Paine)는 푸른 색이라는 여기 원주민의 언어이다. 세계 10대 트레킹 코스에 들어갈 만큼 트레커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특히 3박4일의 W코스가 가장 인기가 있어 우리는 텐트, 침낭, 코펠, 바나 등 야영장비를 숍에서 빌리고, 슈퍼에서 식량을 단단히 준비하였다. 다행히도 한국인 동반자들을 만나 모두 5명이 배낭에 짐을 분배하고 설레임과 긴장감을 안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섰다. 이 공원은 5~9월까지 폐쇄하였다가 얼음이 녹는 이맘때만 공개하는데 입장료(한화 36,000원), 버스, 페리 등 교통비가 비싼 편이었다. 몇 채 없는 산장은 몇 달 전부터 예약이 동나고 숙박비도 비싸 야영지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트레킹 동반자들 ©손훈

나무로 우거진 한국의 산야를 걷다가 이곳에 들어서니 시계가 탁 트여 시원하였고 탄성이 나올 만큼 자연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연초록 구릉지대, 흑갈색 산봉우리, 빙하계곡, 야생화들, 차디찬 호수, 가끔씩 나타나는 구아나또(사슴처럼 생겼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걷는 길이 흙 길이 많아 푹신하고 편안하였다. 굽이굽이 호수길과 산골짜기를 돌다보니 점차 배낭의 무게로 지치기 시작하였다. 일행 중 30대 여성 여행자는 무거운 짐을 곧잘 견디며 우리를 격려하고 분위기를 돋구었다.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식사를 하면서 4일간의 여정을 함께 보내었는데 각별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새벽녘 바라 본 하늘의 별들은 다이아몬드처럼 밝고 총총하여 눈부실 지경이었다. 한 덩어리 은하수를 보니 여기가 천상인가 하고 추위도 잊은 채 상념에 잠기기도 하였다.

웅장한 암봉群 ©손훈

또레스 델 빠이네는 매일 색다르고 다른 풍광을 보여 주었다. 첫 날은 정상에 거대한 빙벽이 있었고 그 아래 에메랄드 호수가 잔잔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셋째 날은 하이라이트(highlight)로서 세 개의 옹혼한 ‘푸른 탑’ 암봉이 산군(山群)을 거느리며 우리를 압도하였고, 산비탈엔 빙하가 부숴지며 하얀 포말을 날리는데 장관이었다. 넷째 날은 또 다른 그레이(Grey) 빙하를 보러 가야 하는데 모두들 지쳐 포기하고 전진기지인 뿌에르또 나탈레스(Puerto Natales) 마을로 돌아왔다. 맑은 날씨를 기다려 이 오지를 탐방하고, 또 젊은 일행들과 함께 신비로운 대자연 속에서 며칠간 머무를 수 있게 해준 조물주에게 깊이 감사 드릴 뿐이다.

또레스 델 빠이네 둘레길에서 ©손훈

겨울이 오면 언제나 움추리며 찬란한 봄을 위해 동면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파타고니아에서 보낸 1월은 너무도 생생하고 역동적이어서 지친 육신을 충분히 달랠 수 있을 만큼 스스로 충만 되었다. ‘수고스러움이 있어야 결실이 있고, 호기심이 충만해야 미지의 세계에 빠져 들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느껴본다.


글 손훈 (2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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