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차례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로 통일한 우리는 색색 가지 나비넥타이로 멋을 내고 단상에 올랐다. 기타 전주(前奏)가 나오자 심호흡을 한 뒤 내가 먼저 앞 소절을 불렀다. 9명의 화음이 강당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이른 봄날에 꿈처럼 다가온 그대 영원할 줄 알았네
그 여름 바닷가 행복했던 모래성 파도에 실려 가버렸네 '
그때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다.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성물을 그녀가 되돌려 줄 때 받는 게 아니었다. 버스 정류장.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우리는 몇 번의 만남과 주고받은 편지를 끝으로 헤어졌다. 정말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그렇게 떠나갔다.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하며 그 사람을 그리워하였다.
대학 신입생에게 미팅 소식은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지방에서 갓 올라온 나에겐 신선한 경험을 안겨다 주었다. 어느 봄날, 선배가 주선한 미팅 장소로 학교 앞 다방에 갔다. 짝짓기가 인상에 남았는데, 디제이 박스(DJ Box)에서 팝송이 나오면 그 제목을 반씩 쓴 카드를 가진 자가 나와서 상대편과 맞추어 보고는 한 쌍이 되어 지정석으로 가는 거였다. 70년대 초, 폴 앵커의 <Crazy love >, 클리프 리챠드의 <The young ones>, 비지스의 <Don't forget to remember me> 같은 곡들이 유행하던 때였다. 내 카드에는 <Don't forget>이라고 적혀 있었고 마침내 발라드 풍의 그 노래가 나오자 가슴이 막 쿵쾅거렸다.
' 떠나가도 좋소 나를 잊어도 좋소 내 마음 언제나 하나뿐
더욱더 사랑 못한 지난 날들 후회하오 '
컴컴한 실내에서 전해오는 그의 목소리는 밝았고 서울 말씨인 듯 낭랑하게 들렸다. 희미한 불빛이었지만 얼굴선이 고와 보였다. 그러나 내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갈 순 없었지만 그는 경청하는 듯 보였다. 우리는 그날 밤, 같이 남산으로 가서 야경을 보며 서로 좋은 친구가 되자고 약속하였다. 대학 진학을 위해 이사 온 우리 가족은 서울에 연고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1년의 재수생활로 외로움과 소외감에 절어있던 나에게 봄날 햇살처럼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보랏빛 라일락 꽃이 흐드러지게 핀 5월. 교정(校庭)의 공기마저 라일락 향기로 달큼하였다. 학교 우체국은 본관 뒤에 있었는데 편지를 보내고 나서 답장이 도착할 즈음 수시로 들락거렸다. 첫 답장이 왔다. 근처 잔디밭으로 달려가 펼쳐 보았다.
" 파란 하늘을 보며 이 글을 씁니다. 구름이 산자락에 걸쳐있는 모습이 너무 평화롭습니다. 처음 만난 자리였지만 낯설지 않고 편안했습니다. 이제 상아탑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청춘을 즐겨야겠지요.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했는데 저 역시 활기로 가득 찬 계절로 느껴져요. 우리 또 만나요.."
우리의 소통은 편지가 유일했다. 당시에는 스마트 폰이 없는 시절이라 가족들이 쓰는 집 전화번호도 받지 못하였다. 만나려면 편지로 미리 날짜와 장소를 알려줘야만 했다. 그러니 한 두 번은 만나서 영화도 보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의사소통에는 불편하였다. 게다가 내 눈에는 그가 그냥 친구가 아니라 여성으로 느껴져 연정(戀情)을 품었던 것 같았다. 한 끼 밥도 뜸을 서서히 들여야 익는 법인데 어머니가 주신 마리아 성패를 선물로 주고, 또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바빴다. 그는 점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 보였고 만나자는 요구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스스로 바람을 맞으면서 그가 다니는 대학 앞 다방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런 날이 반복되자 DJ는 내가 들어가면 스스로 알아서 좋아하는 팝송과 포크송을 연이어 들려주었다.
' 사랑은 한순간의 꿈 백 일 몽 깨어날 수 없는 꿈 백 일 몽
아직 그댈 사랑하오 영원히 사랑하오 '
이루어질 수 없는 꿈, 백일몽을 부를 때는 스타카토(staccato)로 한 음씩 끊어 불러야 이 노래가 살아난다. 우리들은 화음을 살려 마지막 구절을 영화 <쎄시봉>에 나오는 OST(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처럼 잘 마무리 지었다. 관중들로부터 진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송년모임의 한 행사였다.
다음 해, 군대 징집영장이 나오고 신체검사를 받고 나니 그이가 더욱 보고 싶어졌다. 3년간 군인이 되면 휴가도 어려우니 영원히 못 볼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친구 녀석 얘기대로, 학교 앞에서 서성이고 학생들에게 물어도 보고 편지도 여러 번 보냈다. 어느 날, 학교 우체국에서 낯익은 글씨의 편지를 본 순간, 심장이 정지된 듯 잠시 멍하였다. 그의 편지였다. 내 군대 소식을 듣고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자기도 나를 잊은 적이 없으며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자고, 나중에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모른 체하지 말자고 그렇게 꼼꼼히 적혀 있었다. 그 편지를 여러 번 읽고서야 가슴 깊숙이 맺힌 한 가닥 응어리가 풀어졌다. 그의 따스함이 봄날의 온기처럼 나에게 퍼져갔다.
첫사랑 이기도 하지만 첫 사람으로 더욱 남는 그.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쎄시봉 OST인 <백일몽>을 부르면서 추억의 갈피 속에서 되살아난 그 시절이 그립다. 지금 만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몰라보면 어떤가. 마음 한편에 고이 남겨두고 싶은... (끝)
< 라일락꽃 @ 다음 이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