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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Dec 17. 2020

나에게서 다정함을 착취하지 마세요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나에게 전혀 관심 없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걸 참는 것도 힘들었는데, 어떤 이가 나를 미워하는 것이 느껴지면 가슴이 쿵쾅 뛰었다. 내가 어떤 잘못을 했길래 이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뒤덮으며 불안해졌다. 지금까지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전부 되짚으며 어떤 것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행동이 어색해졌고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면극을 했다.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한 거다. 항상 웃었고 타인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친절했으며, 모두를 살뜰히 챙겼고 나와 그들 사이에 대화가 비지 않게 끊임없이 말을 했다. 특히나 단체로 모였을 때는 가면극이 절정을 달렸다. 분위기를 주도했고 괜한 농담을 던지고 스스로 망가지며 사람들을 웃겼다. 나 자신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면 마음이 안정되는 거 같았다. 그들에게 사랑받는 기분이었다. 아니, 적어도 나를 싫어할 빌미를 남겨놓진 않았겠구나-하면서 안심했다.  


강산 씨는 그 밝은 모습이 참 좋아요.
항상 자신감 넘치고 웃는 모습이니까,
어디 가서든지 사랑받을 거 같아요.


사람들은 실제로 나에게 관심 가져줬고 나와의 시간을 즐거워했다.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정확히는 가면 쓴 나의 모습을 사랑받은 것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미움받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에 벅찼다.


사람들이 나보고 위트 있다며, 밝다며, 자존감이 높아 보인다며, 항상 다정하고 에너지 넘쳐 보인다고 했으니까. 이런 평가를 받을 때면 내가 행복한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가면극에 심취해가면서 가면쟁이로 살았다. 사랑받기 위해 발버둥 치려고, 내 가면극을 들키지 않게 그렇게 날 속이면서 지낸 거다. 언 발에 오줌 누기. 그래,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난 당장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발가락에 오줌을 누는 행위가, 나를 위한 안전장치인 줄 알았다.


사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사랑받는다는 것에 만족하면서도, 한 편으로 불안감이 아주 조용하지만, 정말 분명하게 겹겹이 쌓여가고 있다는 걸. 허술한 내 가면이 흘러내려버리면, 흉한 내 얼굴이 보일까 봐 너무나도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이러한 불안감은 자주 연인관계에서 수면 위로 드러나고는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위트 있는 내 모습이 맘에 들어 관계를 시작했던 연인은, 개인적인 관계에서 조용하고 차분한 내 모습을 불만족스러워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활발했던 내가,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전혀 노력하지 않는다고 느낀 모양이다. 난 다정하지 않은 게 아니라, 연인관계에서 만큼은 가면을 잠시 벗어놓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렇게 몇몇의 연인들이 커튼콜도 없이 끝나버린 가면극에 질려 떠나버렸다. 가면극을 해봤자 결국 돌아오는 건 상실감이었다. 그들은 아마 지금도 모를 것이다. 사람들 많은 모임이 끝나고 나 혼자 집에 가면서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샤워하면서 왜 바보 같이 울어버렸는지.


떠나갔던 연인 중 한 명은 내게 말했다.

처음엔 네가 다정한 사람인 줄 알고 좋아했어.
하지만 너는 내가 생각했던 연인의 모습이 아니더라.


나는 이 말을 듣고 오랫동안 슬펐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그랬던 척을 해왔던 걸까 싶어서. 그저 사랑받고 싶어서 했던 가면극이 불러온 부작용은 너무 심했다. 그래, 이건 벌이다. 내가 나를 숨기고 다른 사람인 척 연기했던 벌.


나의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가면을 너무 오랫동안 썼더니 뭐가 진짜 나인지도 모르겠다고. 가면을 벗으면 다정함도 없는 그런 흉한 얼굴을 들켜버릴까 봐 무섭다고. 그러자 오랫동안 나를 보고 깊은 관계를 유지한 친구들은 말해줬다. 수년을 봐온 너는 충분히 다정한 사람이라고. 너의 다정함을 함부로 호출하고 재단하고 착취하는 이들은 가면 속 너의 얼굴을 사랑할 만큼의 마음이 없는 이들이라고. 그러니 네가 필요할 땐 언제든지 다시 가면을 끼우라고. 하지만 우리 앞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된다고. 우린 너의 밝은 모습을 좋아하지만 우울하고 차분한 너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좋아한다고. 어느 한 면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애쓰지 말라고.


이젠 정말 가면극의 대단원을 맺을 때란 걸 알게 됐다.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건 내게 숨 막히는 일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린 거 같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벗어야 했다. 가면 속 내 얼굴은 흉한 것이 아니었다. 난 나의 진짜 모습을 사랑하려고 한다. 누군가는 가면이 더 나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나의 본 얼굴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안전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난 나의 본 얼굴도 내 가면만큼 사랑해주는 사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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