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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Jul 12. 2024

우울해도 괜찮아!

베르나르 뷔페 (Bernard Buffet)


 2019년 베르나르 뷔페전을 관람했으니 올해 전시는 그냥 지나갈까 했다. 하지만 예술의 전당 미술관들의 위치가 어느 한 전시를 빼놓기 애매하게 만든다. 한가람 미술관과 디자인 미술관이 광장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것이다. 원래 목표는 한가람 미술관에서 하는 ‘뭉크’ 전시만 보는 거였지만 뾰족뾰족 베르나르 뷔페가 퀭한 눈빛으로 내 뒤통수를 찌르는 것 같았다. 결국 그 우울함에 이끌려 디자인 미술관을 찾았다. 얼리버드 티켓은 놓쳤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30% 할인 티켓도 하나 잡아 두었으니 할 일 없는 오늘 오전, 나는 뷔페와 함께 하기로 했다.


 요즘 새벽에 자꾸 깬다. 어쨌든 하루를 일찍 시작하게 되니, 오늘도 9시 도서관 문 여는 시간만 기다렸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오픈런을 했다. 2주 후 독서 토론 모임을 앞두고 꼭 빌려야 할 책이 있었는데, 마침 도서관이 예술의 전당 가는 길이니 잠시 들른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오늘 빌린 책은 가와우치 아리오의 책으로, 제목처럼 맹인과 함께 한 미술관 체험기이다. 베르나르 뷔페전은 10시부터니, 잠시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을 읽다 가기로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미술 작품을 ‘본다’니, 어떻게 하는 걸까?”

 작가는 우리와 똑같은 질문을 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동행자는 “극도의 약시로 색을 본 기억이 거의 없고 색을 개념적으로 이해” 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미술은 듣는 것이었다. 또한 “작품 배경에 정통한 사람이 들려주는 해설은 오히려 ‘일직선으로 정답까지 나아가서 따분해.’”라고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결국 가와우치는 자신의 ‘기억 상자’를 열어가며 그림을 이야기하고,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와 ‘경험’을 발견하게 된다. 


 겨우 1장을 읽었는데 미술관에 가는 나의 자세가 조금 달라졌다. 어쩌면 미술 작품과 내 기억 상자가 서로 얽혀 나만의 경험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10시, 미술관도 오픈런이었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이미 문 앞에서부터 친구들과 같이 나온 단체들도 많이 보였다. 이들과 같이 입장한다는 건 상당한 소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나는 오늘 대화로 미술을 이해한다는 책을 읽다 왔으니, 이들의 수다 또한 미술관의 즐거움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각오도 잠시, 입구에서부터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열띤 토론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친구와의 큰 통화는 소화하기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빠른 걸음으로 미술관을 가로질러 입구가 아닌 출구에서부터 감상을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거꾸로 보는 방법을 생각한 이유는 1시간 뒤 있을 도슨트 해설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전문가가 작품 전체를 흩어 줄 테니, 지금은 빠르게 맛보기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대충 작품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오늘의 도슨트 해설자가 등장했다. 2019년 전시 때도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시 뷔페 단독 전시가 처음이라 너무 많은 관람객이 몰렸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 덕분에 그림은 보이지 않고 설명도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2019년에는 도슨트 해설을 거의 건너뛰었지만 그래도 맨 마지막 작품 해설은 들을 수 있었다. 베르나르 뷔페가 자살하기 전 해 그렸다는, 침몰하는 배와 파도치는 격랑의 바다를 그린 풍경화 앞이었다. 


 해설자는 진심으로 그림에 압도되어 자신이 느낀 감상을 극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느끼기에 그의 표현은 다소 감상적이었다. 듣는 전시 참여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해설 방식을 비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단지 오늘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란 책을 일부분 읽고 왔고, 전문가의 해설에 앞서 그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며 베르나르 뷔페와 나의 개별적 연결 고리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뷔페는 젊은 나이에 성공을 이루어냈다. 1950년대 전쟁의 폐허를 재건해야 할 혼란의 시기에 그의 선 굵은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선명한 메시지를 주었을 것이다. 말을 애매하게 (또는 외교적으로) 표현하는 걸 싫어하는 나도 그의 이런 선명성에 매료되었다. 



 배경 가득 날카로운 스크래치, 크고 검은 눈동자와 처진 눈썹, 얼굴의 주름, 두껍게 덧칠된 물감이 보여주는 무게감은 ‘우울해. 우울해. 나 우울해.’를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줘야 할 광대들 또한 구부정한 다리와 비쩍 마른 몸에 슬픈 표정이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옷과 화장만큼은 화려하고 발랄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다른 내면의 우울함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누구나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그 화려한 옷은 누가 입혔을까? 광대는 자신의 손으로 화장을 했고, 스스로 의상을 골라 입었다. 살면서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은 너무나 많다. 사회생활도 직장도, 인간관계도 그렇다. SNS로 소통하는 내 모습 또한 광대처럼 화려하다. 하지만 그 화려함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내 모습이다. 이른 나이에 성공한 뷔페는 그 성공의 단맛을 내려놓고 싶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은 싫었을 것이다. 어쩌면 저 반복되는 광대의 슬픈 표정은 무대를 내려와 혼자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바로 작품과 맞대어 있는 ‘거울’이었다. 작품을 보다가 갑자기 낯익은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이런 배치는 뷔페의 불안하고 우울한 그림 속에 나도 같이 참여하게 만든다. 비스듬히 놓여 있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뒷모습도 앞모습도 아닌 옆모습이었다. 그러니 나를 타인의 눈으로 관찰하는 느낌을 주었고, 그렇게 갑자기 거울 속에서 나를 발견하니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울하고 심각한 얼굴로, 마치 뷔페의 광대처럼 눈썹을 찌푸리고 입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예술을 즐기러 왔다더니,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신랄한 한마디 조언을 남기고 싶다는 관찰자가 되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지친 광대인 나를 변화시켜야 할까? 혼자 있을 때는 좀 지치고 힘들고 어딘가에 기대도 되지 않을까? 베르나르 뷔페가 연속적으로 그린 그의 광대한 성(castle)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창문 안에 뷔페가 지친 광대 분장을 지우고 자신의 모습을 찾고 있을지 모르겠다. 갑자기 드러나는 거울에 놀라지 말고,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만들어내려 하지 말아야겠다. 광대처럼 사는 건 너무 우울할 테니까 말이다. 보이는 삶에 집착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오늘의 베르나르 뷔페는 도슨트의 해설도 사람들의 소음도 방해하지 않는 나만의 시간이어서 더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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