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듣던 대상포진. 드디어 나에게도 찾아왔다.’
‘올 것이 왔구나, 대상포진’
‘반가워, 대상포진’
이런저런 진부한 표현들이 머리를 스친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소한 요놈이 어느 날 오후 뾰로롱 얼굴을 들이밀며 인사했다. 아침 수영할 때만 해도 못 본 것 같은 이 이상한 군집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대상포진은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설마 이 정도 스트레스, 이 정도 피곤함에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리 없다고 애써 무시했다.
일단 땀띠 같은 건 아닐까 생각하며 굴러다니는 아무 피부 연고를 덕지덕지 발라봤다. 살살 간지럽지만 무시하고 참아봤다. 역시나 요놈은 ‘나를 긁어줘!’ 절박한 신호를 보냈다. 결국 인터넷을 뒤지고 이리저리 물어보다 ‘대상포진’ 임을 자체 진단했다.
토요일 아침 눈뜨자마자 동네 내과를 찾았다. 옷을 들춰 피부를 보이자마자 선생님은 바로 ‘대상포진이네요.’라고 단언하셨다. 다소 느긋한 성격의 의사 선생님은 이게 빨리 치료를 시작하면 예후가 좋다면서 많이 안 아프고 지나갈 수도 있으니 너무 겁먹지 말고 푹 쉬라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아프면 먹으라고 진통제도 처방해 주시는 걸 보니 고통을 피해 갈 순 없다는 걸 암시하시는 것 같았다.
이제 집에 돌아와 무엇이 나에게 ‘대상포진’을 주었나 곰곰이 되돌아봤다.
잠을 좀 못 잤다. 원인은 다양하다. 갱년기 증상일 수도 있고, 파킨슨 병이 심해진 시어머니의 시끄러운 잠꼬대 때문일 수도 있다. 간병에 지극 정성인 남편은 밤새 미어캣 마냥 수시로 깨서 덩달아 나도 깨웠다. 그다음부터는 왠지 분한 마음에 잠이 안 왔고, 아침마다 날 선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환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매번 이 시기가 되면 습진처럼 손가락 피부가 벗겨지곤 했는데, 이번엔 아직 그런 일이 없어서 올해는 아직인가 했다. 아마 그 환절기 질환이 대상포진으로 왔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지금하고 있는 ‘독서토론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겠다. 말로는 ‘독서에 이렇게 진심인 사람들과 즐겁게 토론한다’ 하고 있었지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과, 줌인데도 불구하고 심각한 얼굴들을 확인하면 ‘독서의 즐거움’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날도 간질거리기도, 따끔거리기도, 쿡쿡 쑤시기도 하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토론에 나서며 ‘대상포진’ 운운하며 그만둘까 몇 번을 생각했다.
딸의 학교 문제도 걱정이었다. 지난달 무더위를 뚫고 시위까지 나서 봤지만 TV 뉴스 한 꼭지 나오지 않는 걸 보니 허탈했다. 그것 보라고,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불평이 내 속에서 나왔다. 그래도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마음을 다잡고, 뭐라도 할 게 없나 뉴스만 뒤적였다. 하지만 결국 2학기는 시작되고, 아무런 대책 없이 세월만 가고 있다. 저렇게 허송세월하고 있는 딸이 안타깝지만, 본인은 나름 시간을 알차게 보내겠다고 이것저것 바쁘게 지내고 있다. 결국 화는 내 속에만 쌓였나보다.
어쨌든 이미 피부 발진은 시작되었고, 밤새 옆으로 두 개 정도의 군집이 띠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국문을 나서자마자 선생님이 처방해 준 항바이러스제를 먹었다.
매일 3번씩, 1주일간 남기지 말고 다 먹을 것, 술 먹지 말 것, 피곤하게 하지 말 것, 통증이 있다 싶으면 진통제를 먹을 것. 진통제는 하루 3알 이상 먹지 말 것.
소소한 주의사항을 듣고 집에 돌아왔다. 약을 먹자마자 몸이 노곤노곤해지는 게 바로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또 하나의 발진이 그새 생겼고, 이 새로운 녀석들이 이상하게 안에서 콕콕 쑤신다. 약간 시린 느낌이랄까. 등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시큰거리는 느낌이다. 식구들에게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엄포를 놓았다. 누군가는 옷깃이 스치기만 해도 아프다지만,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안에서부터 찌릿찌릿 아팠다.
난 사실 고통에 좀 무심한 편이다. 나에게 ‘아프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라 나의 이런 고통정도야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아직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단속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을 때도, ‘산고의 고통’을 너무 극대화시킨 나머지 나 자신의 고통을 너무 무시했다.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 모두들 아프지 않냐고, 이 정도 진행되었으면 상당히 아팠을 거라고 위로하는데도, 더 극단의 고통이 있을 텐데 이 정도야 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좀 그랬나보다. 누군가가 아프냐고 물어보면 참을 수 있고, 아직 견딜 만하다고 대답했다.
대상포진 5일 차, 신경을 찌르르 흐르는 전기자극 같은 아픔이 좀 있었다. 하지만 그날도 어김없이 집을 나서 도서관 봉사를 갔다. 같이 계신 분에게 아픈 이야기를 했더니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며 깜짝 놀라셨다. 집으로...
대상포진으로 나의 스트레스는 무엇인지, 나를 돌본다는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에게 쉴 곳이 어딘지, 답 없는 질문도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