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환 Oct 02. 2022

어른이 되어서 친구 사귀기

뒤돌아보면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물리적인 공간에서 같이 지내야 하는 학교는 친구를 사귀기 최적의 환경이었다. 나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고 함께 있으면 항상 편안하고 즐거운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스물이 넘어 먹고 사는 일에 쫓기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못한 탓에 친구들을 잃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20대에 이미 학창 시절 친구들과 연락이 다 끊기고 말았다. 지금도 물론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은 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친구는 없다. 지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라고 과거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후 며칠 뒤 가깝게 지내는 전 직장 동료 한 분이 그 글을 읽고 연락을 했다. “그렇지! 나 따위 하찮은 존재는 친구라고 여기지도 않는 거죠? 나랑은 하나도 안 친하다 이거지?” 라고 놀리듯이 말씀하셨다. 하지만 명확하게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써서 상처받았다’는 의미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글에 상처받았다는 말에도 놀랐지만 그 보다 그분이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친하게 지내는 타인만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어쩌면 내가 친구의 정의를 너무 좁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주로 전 직장 동료들이다. 아무래도 같은 물리적 공간 안에서 업무 중에 벌어지는 각종 험난한 사고들을 함께 헤쳐 나갔기 때문에 전우애 같은 것이 생긴다. 한계까지 몰렸을 때의 모습을 서로가 알고 그 모습 조차 서로가 받아들인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환경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깝다고 느껴진다. 확실히 지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가깝게 지내는 전 직장 동료들을 친구라고 부르지 않는다. 호칭도 님이나 씨를 꼭 붙여서 예의 바르게 존대한다. 하지만 그 동료의 집에 놀러 가면 냉장고 열어서 아무거나 막 꺼내 먹고 내가 좋아하는 음료가 없으면 왜 안 사놨냐고 면박을 준다. 물론 여전히 님이나 씨 호칭을 붙이고 존대를 하면서 말이다. 


친구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다른 타인들 보다 훨씬 더 가깝고 친한 사람. 어른이 되어 사귀는 친구라는 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로의 구원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