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난 업무 회고 - 전지적 영어 관점
내 업무환경에서는 영어가 주로 쓰인다. 지난달에는 세 명의 팀원들이 새로 들어왔는데 모두 미국에서 일하던 친구들이라 아무도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 팀 구성원 중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요즘의 내 카운터파트 중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영어가 늘 수 있어서 좋른 것 같기도 하지만 일은 두 배로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애증의 업무환경.
사실 이 상황에는 내가 원해서 뛰어들었다. 분명 힘들겠지만 영어를 잘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부터 영어를 어정쩡하게 잘했다. 영어점수는 잘 나오지만 막상 말은 잘 못하는 그런 수많은 한국인들 중 하나였다. 대학 시절 조별과제를 하면 영어자료 검색을 도맡아 하고 토익점수는 누구보다 높았지만, 막상 학교에 있는 외국인학생들과는 편하게 대화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영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어서 교환학생도 다녀왔고 해외인턴도 다녀왔지만 영어는 언제나 챗바퀴였다. 영어만 쓰는 셋업에 나를 집어넣을 용기가 없었다. 그나마도 첫회사에 취직하고 나서는 정말로 영어 쓸 일이 없었다. 이전 회사에서 네덜란드에 있는 솔루션 회사에 견적 요청을 할 일이 있었는데, 팀에서 그나마 영어를 할 줄 아는 내가 맡았다. 그때 팀원들은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나는 굳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었다. 막상 이메일을 보내려고 하니 생각한 것보다도 더 하고 싶은 말이 나오지 않았고 머리만 하얘졌다. 이렇게 있다가는 영어는 점점 내 삶에서 사라지겠다 싶었다. 그래서 이 회사로 옮길 기회가 왔을 때 잡았다.
처음 한 두 달은 영어로 진행하는 회의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렸다. 나중에는 거의 앉아있기도 지칠 상태가 되어 회의를 듣곤 했다. 아직 듣기만 해도 되는 포지션이라 다행인 상황이었다. 입사한 지 두세 달쯤 되었을 때, 미국인과 처음으로 통역 없이 회의를 했을 때를 기억한다. 내 매니저와 셋이서 진행한 회의였고 정말 용기 내서 작은 질문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질문이 대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기에 뿌듯했다. 입사 네 달 후, 분기 말 다음 분기 목표를 프랑스인 디렉터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영어 스크립트를 적어 달달 외웠다. 발표 동안 PPT 노트 부분에 적은 것을 줄줄 읽었고, 그는 내 말이 너무 빨라서 듣기 힘들다고 했었다. 내용도 부실해서 몇 번의 리뷰 후에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빡빡한 새로운 환경과 영어 쓰는 환경에 동시에 적응을 하느라 나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는 지도 모른 채 시간을 보냈다.
그로부터 삼 개월 후, 새로운 분기가 끝나갈 즈음 실적을 리뷰하는 자리에서 발표를 했다. 이번에도 스크립트를 준비해서 발표했지만 조금 더 자연스러웠다. 달달 읽는 것 같았던 그때보다 외운 티가 덜 났고 중요한 포인트를 사람들에게 짚어주기도 했다. 끝난 후 옆 팀 매니저가 잘 했고 수고했다는 말을 개인메시지로 보내주었다. 사 개월 만에 드디어 조금 더 여유가 생겼다. 그동안 회사에서 지원하는 영어수업을 듣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신청한 링글을 듣기도 했다. 다만 회사에서 지원하는 영어수업은 조금 루즈한 감이 있어서 곧 그만두고 링글을 지속적으로 들으면서 공부했다.
이제 막 팀에 적응한 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새로운 팀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팀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전 팀보다 업무 범위도 훨씬 넓고 영어를 쓸 일도 많은 환경이었다. 이전 팀은 그래도 한국인이 많은 환경이었는데 새로운 팀은 외국인이 대다수였다. 다행히 좋은 매니저를 만나 조금씩 적응해 갔다. 내 매니저는 한국인이었고 한국 액센트가 두드러졌지만 회의를 영어로 리드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리드한다는 것은, 어젠다를 꺼내놓고 그것에 대한 의견들을 받아 회의결론을 정리할 줄 아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은 영어로 사람들을 집중시키고 회의를 마무리하는 그녀가 영어를 잘하는 그 누구보다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단어의 양과 구문의 다양함이 아니라, 영어로 말했을 때 그것을 바로 이해하고 또다시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심플한 문장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걸 느꼈다. 나와 자연스레 비교하게 되었다. 나는 발음은 꽤나 유창한 편이지만 영어로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말의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그녀보다 훨씬 모자랐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지경까지 이르는 긴 문장으로 뱉을 때가 많았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언정 내실 없는 언어능력이었다.
그녀의 우산 아래에서 행복하기를 잠시, 6개월 뒤 그녀는 회사를 떠났다. 엄청난 업무량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일은 곧 대부분 나에게로 넘어왔다. 다시금 고군분투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지난 6개월 동안 언어적으로 성장한 것이 있기는 했다. 통역에 의존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통역을 쓰는 것도, 쓰지 않는 것도 불편한 애매한 상태가 되었다. 아무래도 통역을 통해 들으면 말한 사람의 뉘앙스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이제는 통역이 있어도 듣는 것은 영어로 듣고 내가 할 말은 한국어로 했다. 다만 완벽하지는 않아서 중요한 자리에서 중요한 말을 놓치고 회의가 끝난 후 다른 사람들에게 확인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큰 회의는 보통 영어, 중국어, 한국어 구사자가 모두 모이기 때문에 통역도 세 언어가 각각 있다. 나는 영어 구사자가 말할 때는 통역을 꺼 두었다가 중국어 구사자가 말하면 황급히 통역을 한국어로 바꾸어야 했다. 이것이 은근히 번거로웠지만 한국어로만 듣자니 영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뉘앙스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통역을 바꿔가며 듣는 것이 번거로워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살폈는데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어도 영어 통역으로 듣고 있었다. 그들은 굳이 한국어를 택하기보다 영어를 선택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인상 깊었다. 아무래도 의사결정자들은 대부분 영어구사자였기 때문에 영어로 말하는 편이 여러 모로 나은 것이 사실이었다. 나도 언젠가 영어 통역이 편해져서 중국어도 영어 통역으로 듣는 날이 올까 싶었다.
시간이 지나며 매니저의 빈자리를 조금씩 메꿔갔다. 내가 리드하는 회의가 많아졌지만 대부분은 한국어로 진행했다. 언제 한 번 통역이 없는 회의를 리드한 적이 있었는데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데만 해도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들은 내 말을 이해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들였다. 결국 그 후속 회의는 통역과 함께 진행했다. 간단한 일감이고 모두 영어가 제2언어인 참여자들이라서 시도해 볼 만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직 통역 없이 회의를 리드하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회의에서 회의를 리드할 때는 한국어로 진행하되, 나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이 영어로 말할 때만 영어로 답했다. 그것도 조금은 버거웠다.
얼레벌레 적응을 하느라 일에 파묻힌 삶을 잠시 일시정지하기 위해서 하와이에 꽤나 길게 다녀왔다. 하와이에서 사람들과 부딪히자 내가 지난 일 년 반 동안 고군분투한 것이 조금은 영어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이전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는 못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서핑하며 만난 친구들과 바다에서 잡담을 하고 월마트 캐셔 할머니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한탄을 들으며 지냈다. 다만 그것은 일 대 일 대화를 할 때에만 한정되었다. 여러 명과 같이 대화를 하는 상황에서는 나는 다시 벙어리가 되었다. 원어민들끼리 얘기할 때의 언어 속도, 단어는 나와 얘기할 때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그들은 나를 위해서 맞춰주고 최대한 표준에 가까운 단어를 써 주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와이에서 시간을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하와이에서 지낸 시간 덕분에 조금 더 영어가 편해졌다. 그런데 새로운 난관이 또 다가왔다. 새로운 팀원들이 들어왔기 때문인데, 그들 세 명 모두 영어가 모국어처럼 편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이 팀의 구성원 중 영어가 편하지 않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이제는 팀회의에서 통역을 쓰지도 않는다. 대부분 카운터파트도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 영어에 대한 니즈가 그 어느 때보다 큰 환경이었다. 여전히 내 가장 콤플렉스는 영어였다.
새로운 팀원들과 서로를 소개하는 자리가 있었다. 내 소개를 하며 “벌써 이 팀에서 일한 지 일 년 반이나 되었네요”라고 얘기했는데 그가 “나는 한 달 되었는데 비슷한 느낌이다”라는 뉘앙스로 얘기를 했다. 나는 그걸 못 알아듣고 진지하게 그를 정정해 주었었다. “아니 나 일 년 반 되었대도”라고. 그 순간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리고 너무나 멋쩍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직 농담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캐주얼한 대화에서 맘 편히 웃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한편 이번 주 목요일엔 디자인 관련해서 리뷰하는 자리가 있었다. 내 의견을 열심히 영어로 말을 했는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 자리에 있던 한국인도 미국인도. 그 회의는 한국어로 말하면 30분 만에 큰 에너지 쓰지 않고 끝날 것이었는데 통역 없이 진행하여 50분 만에 끝났고 나도 진이 빠졌다.
이번 주에는 나를 생각하게 만든 일종의 터닝포인트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 팀원들과 미국팀원들이 같이 진행하는 회의에서 일어났다. 대부분의 참여자가 한국어를 못했지만언제나처럼 나는 한국어로 회의를 시작했고 아차 싶었다. 어젠다는 내가 영어로 말하기에 무리가 없는 심플한 건이었고 심지어 화면공유로 위키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영어로 회의를 시작하는 게 나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컴포트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회의에 참여한 다른 분이 두드러진 한국 악센트로 또렷하게 영어를 말했다. 그가 사용한 문장구조는 단순했고 쉬운 단어들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명확해서 못 알아들을 부분이 하나 없었다. 그의 당당함에 부끄러웠다. 영어에 압박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가 티가 났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쉬운 단어, 간단한 단어를 사용해서 하고 싶은 말을 명확하게 전달하면 되는데 그게 왜 그렇게 어렵게 느껴질까.
또 다른 하나는 CEO와 진행하는 회의였다. 난생처음 CEO를 보는 자리었다. 거기 참석하는 네 명 모두 국적은 달랐지만 나 빼고 모두 2개 국어 능통자였기 때문에 아마도 통역이 없겠지 싶었다. 하지만 회의 예약 스케쥴을 보니 통역이 세팅된 것을 보았다. 아마도 내 디렉터의 배려였겠지만 나에게 현실을 인식하게 했다. “내 디렉터는 나는 통역 없이는 회의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사실이었다. 통역이 있는 회의와 없는 회의에서 내가 말하는 양은 절대적으로 차이가 난다. 통역이 없는 회의에서는 나는 의도치 않게 과묵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생각을 해도 이미 다른 누가 치고 들어와서 내가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한 마디를 말하기 위해서 열 번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CEO미팅의 통역은 취소되었고 통역 없이 들어갔다. 한 시간 입을 꾹 다물고 테드 강연을 들은 것 같은 시간이었다.
이 두 개 사건들로 인해서 나의 영어를 조금 더 돌아보았다. 쉬운 단어로 말하고 쉽게 생각하기. 이것 하나에만 집중해도 모자란 때였다. 이를 통해서 즉석에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했다. 영어를 공부하는 때에도 기존처럼 링글 수업을 할 때 답을 미리 준비하는 방식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미리 답을 준비하면 그것을 슬쩍슬쩍 보며 읽는 것은 쉽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나는 것을 쉬운 문장으로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질문에 바로 답하고 즉석에서 나온 생각을 말을 하는 연습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즉석에서 질문을 여러 개 받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한다. 때문에 요즘은 크게 수업 준비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쉬운 단어를 입에 익히려고 노력할 필요갚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단어는 이제 들으면 안다. 정확한 뜻은 기억이 안 나도 뉘앙스는 어느 정도 알겠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도저히 안 나온다. 단어구사력이 별로여도 좋으니 하고 싶은 말을 편안하게 하는 자세가 나에게는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내가 자주 쓰는 단어인 “exhausted”라는 단어를 어제 수업에서 썼는데, 선생님이 그 대신 drained, worn out, spent라는 단어를 써보라고 제안해 줬다. 다 내가 아는 단어다. 사실 다른 단어들이 더 쉽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같이 exhausted 만 쓴다. 내 입에 붙은 단어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
특히 대화를 하느라 머리에 피가 쏠린 상황이면 하고 싶은 말을 길게 늘어진 문장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뜻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문장을 때문인데, 그게 사실은 더 상대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말할 때 긴장을 놓도록 연습하는 방법이다. 간단하게 쉬운 단어를 써서 끝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발음 같은 경우도 수업을 하면서 문제를 찾았다. 나는 입을 많이 안 움직이고 말하는 버릇이 있는데 특히 턱을 많이 열지 않는다는 것을 수업을 하며 알았다. 이게 특히 영어를 말할 때 “ow” 발음을 명확하지 않게 만들었다. 튜터에게 여러 번 피드백을 받고(아마도 열 번은 넘게,,) 드디어 이 버릇을 고칠 수 있었다. 말을 할 때 턱을 조금 더 여는 버릇을 들였다. 확실히 이런 보조수단이 있는 것이 혼자 회사에서 말하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수업 피드백 덕에 조금 더 뾰족하게 내 단점을 고쳐나가고 있다. 회사에서는 누구도 나의 언어 능력에 대해서는 피드백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회사를 떠나기 전까지 이룰 목표 중 하나는 영어로 회의를 리드할 만큼 잘하는 것이다. 내 예전 매니저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한 문장을 명확하게 말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이 회사에 있는 동안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세상은 그렇지 않은 세상보다 훨씬 더 넓고 다채롭다. 영어 유튜브를 볼 수 있는 세상조차 영어 유튜브를 볼 수 없는 세상보다 훨씬 더 광활하다. 이 회사에 있는 동안 그것만은 성취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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