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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Sep 15. 2021

진정성이 필요한 순간

필립모리스 코리아 대표는 비흡연자다. 우연하게 인터뷰를 읽었는데 ‘담배 연기 없는 미래’라는 회사 비전의 진정성을 보고 합류하게 되었다고 했다. 양자 흡연가로 사는 나는 비흡연자의 흡연자를 위한 진정성은 무엇일까 잠시 생각했다.


한때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폭탄처럼 우리 사회를 휩쓸던 때가 있었다. 진정성은 ‘진짜’보다는 좀 더 신실하고, 먹물 느낌이 든다. 셰리프 한자로 썼을 때 의미가 증폭되는데, 사전적인 ‘진실하고 참된 성질’이란 의미뿐 아니라 유기농, 선량함, 오리지널, 본성, 독창성, 태도 같은 말을 대체하기도 한다.


면접을 볼 때 자주 언급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진정성은. 면접관은 피면접관의 답변에서 진위를 가리려고 노력하는데, 이는 인간다운 매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피면접관이 답변에 담아야 하는 것은 진정성으로 느껴지는 표현력이지, 속 깊은 진실이나 진짜가 아니다.


성북동에 있는 한 편집회사에서 일할 때였다. 조직개편이 단행된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실제로 리더들이 조직 개편을 논의하고 있었다. 당시 본부장과 팀장 둘셋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기획자에게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문제는 일부만 도착했다는 것이다.  


“본부장님, 저는 이 팀에 뼈를 ”


우리는 이다음에 올 문자 메시지를 꽤 오래 기다렸으나 도착하지 않았고, ‘뼈를’ 다음이 무엇인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타이밍 상 “묻겠다고 결심했다”는 진정성을 담은 표현이었겠지만 “뼈를 묻는 게 나을까요?”와 같은 의문형일 수도 있고, “뼈를 묻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제안형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종결어미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각자의 마음을 담아 뒤를 서술했다. 그때 나는 대강 이렇게 답했던 기억이 난다.


“저라면, 이렇게 보냈을 거예요.
‘이 팀에서 뼈를 우리겠다…’
묻는 것보다는 뭔가 더 생산적이잖아요.”


어쨌든 그의 문자 메시지는 도달에 실패했고, ‘진짜’였을 거 같은 절박함이 감점의 요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진정성’, ‘진짜’ 이런 단어가 들어간 문장들 대부분을 의심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령 패션지에서 흔히 보는 ‘진짜 쉬운 염색 머리 관리법’이나 ‘이곳이 진짜 명소’ ‘진짜 내 향수를 찾기 위한 가이드’ 같은 기사에 번번이 당했기 때문이다. 정말 진짜 당했다…


내가 일상에서 진심으로 ‘진짜’라는 단어를 쓸 때를 떠올려 본다. “그걸 진짜 말이라고 하냐?” “진짜 그렇게 생각해? 진짜? 진짜?” 다그친다. 진짜가 의심되는 순간, 진심을 의심하는 순간이다.


김혜순 시인의 <자욱한 사랑>이란 시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다.


“사랑은 사랑이 있는 곳에서
가장 많이 모자란다는데”



우리는 진실성이 의심되는 그 순간에 가장 많이 ‘진정성’과 ‘진짜’를 양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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