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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맥스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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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Oct 12. 2023

가끔은 서서 가는 버스가 좋다

감사의 밀도

맑은 하늘에 햇살이 따뜻했던 토요일 오후였다. 버스를 타고 교회에 갈 예정이었다. 주일에는 보통 남편이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편히 이동한다. 하지만 가끔씩 주말 모임이 있거나 청소 순번이 돌아오는 토요일이면 버스를 탄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교회까지 가는 거리가 상당히 길어지지만 자가용보다는 이 편을 택한다. 아직 나의 운전은 십오 분 짜리, 길어야 삼십 분 짜리이다. 그 이상 운전하는 일을 애써 만들지 않기에, 말 그대로 동네 운전에 머물러 있다. 장거리 운전은 때가 되면 자연스레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여전히 운전석보다는 조수석이 편한 나는 별 고민 없이 지하주차장이 아닌 집 앞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배차 간격이 긴 좌석 버스라, 놓칠세라 부랴부랴 뛰었다. 동네에서 출발해 교회가 위치한 강남까지 가는 버스 안은 늘 승객들로 붐빈다. 이용객에 비해 버스 수가 부족한 탓에 앉은 이와 서 있는 이가 반반이다. 이번에도 나보다 앞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세어보니 예닐곱 명은 되어 보였다. 다행히 버스 안에는 드문 드문 자리가 있었다. 버스 뒤편, 통로 바로 옆 자리에 주저 없이 앉고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토요일 오후라 교통 체증은 평소보다 더할 테지만 나는 앉아서 간다는 마음에.



동네를 벗어나면 중간 정차 없이 한 시간가량 직행으로 달리는 버스이다. 그러니 승객들은 스마트폰에 열중하거나 한잠 빠져들기에 좋은 시간이다. 버스 역시 도로 위를 움직이는 작은 소음만 낼뿐 말이 없다. 대화나 라디오 음악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길쭉하고도 좁은 공간 안에서 나도 나른해졌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반은 꿈속에, 반은 현실 속에 있는 듯한 몽롱한 기분으로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저기, 죄송한데요. 이 분이 아프신 것 같아요."



젊은 남자 목소리에 잠이 깬 것이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 바로 옆, 통로에 서 있던 남자 승객의 목소리였다. 본인이 아픈 게 아니라, 옆에 서 있던 여자 승객을 두고 내게 건넨 말이었다. 이 분이 누굴까. '이 분'을 찾아 얼굴을 돌림과 동시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 앉으세요!"


  

대학교 1, 2학년쯤 되었을까. 앳된 여학생 한 명이 쓰러질 것 같은 하얀 얼굴로 좌석 등받이 시트를 움켜쥔 채 서 있었다. 눈도 잘 못 뜨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라고 했다. 내가 일어나자 그녀는 풀썩 자리에 앉았다. 사람 많고 밀폐된 버스 안이다 보니 숨 쉬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아픈 그녀를 발견한 남자 승객은 빈 좌석이 없으니 잠들어 있던 나를 깨웠던 것이었고. 



짐작하건대, 그녀는 눈앞이 노래지고 식은땀이 났을 것이다. 나 역시 몇 번, 그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중학교 때 아침 조회시간, 운동장에 서 있다가 온 세상이 노래져 구령대 의자에 주저앉았던 일, 회사 출근길 버스에서 서 있다가 속이 울렁거려 중간 휴게소에 내렸던 일이 떠올랐다. 큰 아이를 낳은 날도 화장실에 갔다가 쓰러지는 바람에 필름이 잠깐 끊긴 일도 있었다. 나처럼 빈혈이 있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몸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아파오곤 한다.



그런데 두 번은 경험하기 싫은 곤경 속으로 나를 되돌려놓고 보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구령대 의자에 앉아 '세상이 이렇게 노랗게 보일 수 있나' 생각하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 또한 노랗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다가오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출근길에 휴게소에서 쉬어가야 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회사 부장님께 '이런저런 이유로 지각해서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자마자 오늘 하루는 집에 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냐며 부장님은 곧장 전화를 걸어오셨다. 그 전화에 힘이 났던지, 거짓말처럼 어지럼증은 사라졌고 나는 꿋꿋하게 출근하고야 말았다. 아이를 낳고 필름이 끊길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던 날도, 화장실로 금세 달려와준 남편과 간호사 분 덕분에 되살아났다.



내릴 역까지 아직 30분은 남았는데 버스 통로에 서서 가자니 할 일이 없어졌다. 굽이굽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라 스마트폰을 보기도, 책을 펼치기도 쉽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앉아있는 승객들을 몰래 관찰했다. 결혼식 하객룩을 입고 한껏 멋을 낸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신기하게도 여러 명이 검은색 가죽의 각진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올 가을 유행하는 아이템일까? 나는 저렇게 생긴 가방이 있나? 잠시 마음 속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집에 있는 핸드백이 너무 많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 역은 선바위역입니다."



어느새 버스에서 내릴 때가 되었다.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복숭아빛으로 혈색이 돌고 있는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고요하고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에 그녀도 나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학생은 두 번이나 연속해서 내게 고마움을 전했다. 서로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린 이제 무관하지 않은 관계가 되었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이 만큼 밀도 높은 말이 또 있을까. 온기 가득한 밥 한 그릇을 먹은 것처럼 단번에 마음이 채워졌다.



버스가 정차했다. 카드를 찍으며 나 역시 버스 기사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장거리 운전의 피로를 대신 짊어지시고 안전하게 갈 길을 가주셔서, "감사합니다!" 




버스라는 이 작은 세상에 올라탈 때면 투덜거리는 마음이 앞섰다.  안을 벗어나 어디론가 간다는 실감에 마음이 설레는 것은 잠깐. 배차 간격이 길고, 앉아서 가는 일이 보장되지 않아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버스를 이용할 때마다 민원을 넣어야겠다고 종종 다짐했다. 다짐은 번번이 희미해졌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서서 버스를 타는 것도 좋다.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준 날, 감사라는 말에 담긴 온기를 이토록 충만히 누렸으니. 지금도 학생의 평온해진 얼굴이 아른거린다. 그녀도 깨달았을까. 힘든 세상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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