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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Nov 06. 2023

영원의 일부로 존재하는 예술에 대하여

읽는 마음(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890')

젊음은 '건강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떤 ‘가능성’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18세기말 아일랜드, ‘예술의 완성’을 꿈꾸었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이상을 소설 속 주인공에게 이입하여 이루고자 한다. 아름다운 외모에, 젊음으로 충만했던 도리언 그레이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오스카 와일드가 추구하던 ‘미의 실현’을 이루는 데 완벽한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다.



소설은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이 그려진 작업실에서 시작된다. 화가 바질 홀워드는 아름다운 도리언에게 예술적 영감을 받아 그 얼굴을 초상화에 담고,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 수준의 작품을 구현해 낸다. 바질의 친구 헨리 워턴 경은 그것이 가능하게 한 도리언의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그리고 아직 순수한 그에게 도덕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운, 감각과 육체적 쾌락을 좇아 사는 삶에 대해 설파한다. 그의 눈에 비친 도리언의 ‘젊음’은 자신은 갖지 못한, 완전한 예술을 향한 ‘가능성’이었기 때문이다.



도리언의 삶은 헨리의 말을 들으며 마법에 걸린다. 또한 자신이 가진 젊음과 아름다움이 특권임을 깨닫는다. 어머니의 이른 죽음, 외할아버지의 학대 속에 자란 도리언은 대신, 많은 부를 상속받았다. 이제 그가 추구할 것은 헨리의 조언대로 자신의 감각을 만족시킬만한 즐거움과 아름다움 뿐이다. 도리언은 자신의 특권을 절대 권력처럼 무섭게 휘두른다. 비극은 주변 인물의 죽음으로 극대화된다. 서민 계층을 위해 오페라 공연을 했던 시빌 베인은 도리언과 약혼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그의 언행과 변심으로 자살하게 된다. 도리언은 한 인격체로서 시빌 베인을 사랑한 것이 아닌, 그녀의 보이는 연기만을 사랑했던 것이다.



한때 사랑을 고백했던 여인이 죽었어도 도리언은 그것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자신은 헨리의 말을 따랐을 뿐이라 핑계 댄다. 그리고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영원히 늙지 않고, 변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 뒤로 기도는 무섭게 이루어진다. 도리언은 시간이 지나도 늙지 않고 대신 초상화 속 얼굴이 그의 죄악을 드러내며 점차 늙고 추하게 변해간다.



‘오래전 바질 홀워드의 정원에서 그의 곁에 앉았던 헨리 경이 자극한 내면의 호기심은 점점 자라나며 희열을 선사했다.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알고 싶은 갈망도 더 커졌다. 도리언의 내면에는 먹이를 줄수록 더 왕성해지는 광적인 허기가 있었다.’(p.157)



도리언의 ‘광적인 허기’는 끝없이 예술품을 탐닉하고도 채워지지 못했다. 그의 젊음은 끝을 알 수 없는 쾌락의 길로 질주하게 만드는, 위험한 연료로 점차 변질되어 간다. 선과 악에 대한 기준 없이 달리던 도리언의 열차는 결국 파멸의 낭떠러지로 고꾸라지고 만다. 18년의 세월이 흐르고 도덕적 평판이 나빠진 도리언을 어느 날 바질이 찾아온다. 초상화의 비밀을 알게 된 바질은 도리언의 죄악을 그 앞에서 고발한다. 도리언은 순간적인 분노로 바질을 죽이게 되고 그 시체까지 비밀리에 처리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일그러져가던 그의 양심, 초상화뿐이었다.



‘도리언은 초상화를 없애자고 결심했다. 애초에 왜 그렇게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을까? 한때는 그림이 변하고 늙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런 즐거움이 사라졌다. 그림 때문에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집을 비울 때면 다른 사람이 초상화를 보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것이 불러일으킨 멜랑콜리에 그의 열정이 퇴색했다. 그림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기쁜 순간이 빛을 잃었다. 도리언에게 그것은 양심과도 같았다. 그렇다, 양심이었다. 그는 그것을 없애기로 했다.’ (p.230)



소설은 도리언이 추악하게 변한 자신의 초상화를 찢어버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하인이 본 것은 도리언의 ‘아름다운 젊음과 미모를 전부 담아낸 눈부신 초상화’(p.231)였고, ‘주름투성이에 혐오스러운’ 얼굴의 도리언은 시신으로 변해있는 모습이었다. 도리언의 초상화는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오고, 도리언이 대신 죽은 것이다.



표면상으로 도리언의 죽음은 광기 어린 쾌락주의자의 파멸로 해석된다. 그러나 도리언이 죽었음에도 그의 초상화는 훼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아 눈부시게 빛난다. 결국 도리언의 초상화는 모든 것이 파멸에 이른 이후에도 홀로 그 아름다움을 보존한 예술 작품으로 남는다. 이 대목에서 유미주의를 주창했던 작가의 이상이 실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을 자신의 젊음에 기대어 쾌락만 일삼는, 타락한 청년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도리언은 ‘예술은 인생 최고의 위안이다’라고 말했던 프랑스 작가 ‘테오필 고티에’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예술 작품이 자아내는, 드러내는 분위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p.131) 작가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예술은 사회적 통념과 관습을 뛰어넘어 그 자체로 향유할만한, 완전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대상이지 않았을까. 예술 자체가 찬미의 대상이 되는 모습은 도리언이 각종 미술품이나 보석, 실크 옷감과 수를 놓은 천 등을 수집하는 대목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부족함 없는 영국 귀족 계층도 1890년대, 세기말을 보내며 불안은 더욱 거세졌을 것이고  예술은 아마도 그들의 도피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여성을 주변 인물로 국한시키고 바질과 도리언, 헨리라는 세 남성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당시 여성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위치에서 소외되어 있음을 역으로 알 수 있었다. 바질은 도리언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소설은 출간 이후 동성애 논란에 휩싸였다. 몇 번의 원고 수정에도 불구하고 오스카 와일드는 작품 발표 이후에 사회적 질타를 피할 수 없었다.



1895년, 그는 동성애 사건으로 2년간 교도소 생활을 해야 했고, 영국에서 추방되어 파리의 어느 호텔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실현했을지 몰라도, 타인에게 비친 삶의 마지막은 비참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 그는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도 잘 차려입은 복장을 하고서 거리로 나섰다. 밖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나, 오스카 와일드요."라고 말하며 당당히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렇듯 자유분방하고 자신감 넘치는 오스카의 성향은 작가적 신념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예술의 완성을 향한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는 듯하다. 인간은 스스로 불완전하고 유한한 삶을 살기에 변함없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 대상을 갈망한다. 그러한 열망이 담긴 것이 바로 예술 작품이 아닐까 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어떤 예술 작품이 가진 가치를 재단한다. 그렇게 평가된 작품들은 대중 속에서 빛을 발하기도, 어느 순간 소리 없이 사장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예술은 영원할 수 없다. 하지만 영원의 일부로 예술은 우리 곁에 존재한다고 본다. 그것을 더 가까이, 열린 감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대중들이 많아질수록 예술은 '완성'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바질 홀워드는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고,

헨리 경은 세상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며,

도리언은 내가 되고 싶은 존재입니다…….

어쩌면 다른 시대에.’

<오스카 와일드, Complete Letters(Fourth Estate, 2000), p.585>



ps. 이 책을 읽고서 그가 지은 동화 '행복한 왕자'를  다시 펼쳐보았다. 궁전에서 살다가 죽음 이후, 도시의 동상이 된 왕자는 제비를 통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돕는다. 사파이어로 된 눈과 붉은 루비가 박힌 검,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자의 몸은 가난하고 약하며, 아픈 이들을 위해 나뉜다. 결국 흉물이 된 왕자 동상은 제비의 시체와 함께 버려진다. 하지만 천사는 '지상에서 가장 귀한 두 가지'를 가져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왕자의 심장과 죽은 제비를 가지고 온다. 도리언 그레이와 행복한 왕자. 같은 작가가 그린 두 인물은 참 대조적이다. 도리언의 양심은 궁전 안의 세계에만 머물며 자기 쾌락만 좇다 파멸한 반면, 행복한 왕자의 양심은 궁전 밖,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수용할 줄 알았던 고귀한 것이었다. 선과 악,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인간의 이중적 내면이 한 작가가 쓴 두 작품을 통해 선명히 대비되어 흥미로웠다. 계급과 빈부 차이가 극명했던 시대, 작가는 당대 영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특유의 문체로 통렬히 꼬집은 듯하다. 오스카 와일드 본인은 정작 어떤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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